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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세계를 바꾼 몽골, 몽골을 바꾼 와인

등록 2023.02.04 06:06:00수정 2023.02.04 10:3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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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몽골제국의 2대 칸인 오고타이(1186~1241)의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몽골제국의 2대 칸인 오고타이(1186~1241)의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국가는 대영제국이다. 전 세계 육지 면적의 22%인 3500만㎢, 당시 세계 인구의 20%인 4억5800만명(1938년)이 대영제국에 속했다.

그 다음은 몽골제국이다. 1279년 전성기 시절 영토는 세계 육지 면적의 16%인 2400만㎢에 달했고, 세계 인구의 25%인 1억1000만명을 지배했다.

하지만 두 제국 간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영국이 호주·아프리카 등을 식민지로 삼아 군사적으로 비교적 쉽게 영토를 확보한 반면, 몽골은 국경이 연결된 강국들을 하나하나 평정하면서 제국을 확장했다. 징기즈 칸은 미국 타임지와 워싱턴포스트지에서 ‘지난 1000년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뽑혔다. 예전 몽골제국이 지배했던 영토엔 지금 세계 인구의 절반인 40억여명이 살고 있다. 전 세계 남성의 0.5%인 1700만명이 유전적으로 징기즈 칸의 후손이라는 연구도 있다.

징기즈 칸은 10만명 정도의 병력으로 세계의 절반을 정복했다. 당시 몽골의 인구는 100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오늘날 기업 한 곳(미국 월마트)의 직원 수가 230만명이다. 당시 금나라의 인구는 50배, 병력 수는 몽골보다 5배나 많았다.

몽골은 세계사를 통째로 바꿨다. 몽골의 정복전쟁 동안 세계 인구의 10%인 40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따르면 이로 인해 13세기의 탄소 배출량이 7억톤 감소했고 지구 온난화가 200년 지연됐다.

몽골군은 민첩하고 통합적인 기습 기병전술과 혁신적인 공성기술을 전쟁에 도입했다. 이로 인해 수비형 성벽을 가진 도시와 무거운 갑옷으로 중무장한 유럽의 기사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역참제로 불리는 체계적인 통신과 물류 네트워크는 몽골군의 전쟁 수행역량을 높였고, 문명 간의 기술과 문화 교류에도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또 몽골제국에 대규모의 와인을 공급하는 파이프라인 역할도 했다.

역참은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에도 있었지만 사람 거주지 사이의 도로를 따라 놓인 단선적인 형태였다. 반면 몽골은 속도와 기능을 중심으로 본토에서 흑해 연안까지 오늘날의 인터넷 웹같이 역참을 32~64㎞마다 하나씩 거미줄처럼 엮었다. 파발마는 하루 최고 350㎞를 주파했다. 이는 6000㎞ 거리인 동유럽에서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까지 17일만에 도달할 수 있는 속도다. 2대 칸인 오고타이가 완성했다.

역참은 대규모 물류 허브로도 작용했다. 매일 수레 500량이 카라코룸으로 들어왔다. 와인은 역참을 통해 토기와 가죽부대에 담겨 몽골에 들어왔다. 동유럽과 조지아 지역에서 조공으로 들어온 와인이 하도 많아 선별이 필요했다.
 
몽골인들은 술을 과음했다. ‘아이락’(airag) 혹은 ‘쿠미스’(kumis)로 불리는 알코올 도수 3% 내외의 마유주를 주로 마셨다. 이슬람에서 들어온 증류주 ‘아락’(arak)과는 다른 술이다. 남자들은 술이 센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많이 마시기 위해 일부러 토하기도 했다. 여자들도 술을 즐겨 마셨다. 세계정복 전쟁을 시작하면서 곡주, 와인, 증류주, 벌꿀주도 몽골에 들어왔다.

술은 지배계층에게도 필수품이었다. 특히 칸의 과음은 심각한 문제였다.

징기즈 칸이 도교 지도자 구처기(丘處機, 1148~1227)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검소한 생활을 했던 징기즈 칸은 과음을 경계했고 주로 마유주를 마셨다(‘라시드 알딘’, 1250~1318).

하지만 후대의 칸들은 대부분 알코올 남용으로 치명적인 후유증을 겪었다.

징기즈 칸의 3남이자 2대 칸인 오고타이(1186~1241)가 대표적이다. 오고타이는 특히 와인을 과음했다. 후계자 추대를 위해 40일간 열린 ‘쿠릴타이’에서도 매일 만취했다. 충신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가 부식된 와인 잔을 보여주며 ‘쇠붙이도 이렇게 녹는데 오장육부는 괜찮겠는가’하며 과음을 말렸다. 이에 오고타이는 옳은 말이라 하고는 그에게 황금과 비단을 하사했다. 그러나 그 후엔 더 많이 마셨다. 둘째 형인 차가타이의 충고에 따라 마시는 잔의 수를 줄이기로 하고는 술잔의 크기를 2배로 만들었다(‘몽골비사’). 그는 결국 술 때문에 죽는다.

오고타이의 장남이자 3대 칸인 구육(1206~1248)도 술을 과음해 재위 2년이 안된 42세에 사망했다. 3남인 카시(1215~1236)는 와인과 증류주를 과음해 20대 초반에 죽었다. 징기즈 칸의 4남으로 2대 칸을 양보한 툴루이(1192~1232)도 용맹했지만 술 때문에 일찍 생을 마감했다.

툴루이의 장남인 4대 몽케 칸(1209~1259)도 와인을 과음했다. 프랑스 수도사 윌리엄 루브룩(1220~1293)의 기록에 따르면, 몽케는 수도 카라코룸에 대형 연회장을 마련해 수시로 파티를 열었다. 은으로 만든 나무의 꼭대기에 트럼펫 부는 천사와 함께 사자가 마유주를, 네마리의 뱀이 포도주·증류주·벌꿀주·곡주를 각각 흘려보내는 장치를 마련해 즐겼다.

툴루이의 4남으로 5대 칸이자 원나라를 건국해 중국을 통일한 쿠빌라이도 와인을 매우 좋아했다. 카시의 아들 카이두(1230~1301)와 벌인 50년 내란으로 실크로드가 단절됐지만, 원나라는 와인의 전성기였다. 카이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적당히 와인을 마셔 79세까지 살았다.

몽골제국은 세계사를 바꿨고, 와인은 몽골제국의 역사를 바꿨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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