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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대로]최초의 삐라는 광복군이 뿌려…6·25 땐 28억장 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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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07-12 07:30:00
영어 bill→일본어 비라→우리말 삐라 변천
광복군 제3지대, 일본 군수공장에 첫 살포
6·25전쟁 당시 미군과 한국군이 대량 살포
2014년 탈북민 대북삐라로 총격전 발생
쿠바에서도 삐라 살포하던 비행기 격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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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625전쟁 시 국군의 전단 제작 장면. 2020.07.09. (사진=이윤규 박사 기고문 캡처)

※ '군사대로'는 우리 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연재 코너입니다. 박대로 기자를 비롯한 뉴시스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군의 이모저모를 매주 1회 이상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탈북민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로 한반도가 한동안 떠들썩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모욕하는 내용의 대북전단이 북한 각지에 뿌려지자 이에 격분한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을 비방하는 대남전단을 대량 제작하는 등 보복을 시도했다.

이 와중에 북한은 남북한 연락망을 모두 끊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켰다. 대북전단과 대남전단을 둘러싼 감정 싸움 탓에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의 성과가 상당 부분 무산되거나 후퇴했다.

한반도 시계를 2년여 전으로 되돌려버린 대북전단과 대남전단은 원래 삐라로 불렸다. 삐라의 어원은 영어 'bill(계산서, 조각)'이다. 이 영어 단어가 일본어 비라(ビラ)로 변했고 이후 우리말로 넘어오면서 된소리로 삐라가 됐다. 일본어 비라는 찌라시(ちらし)와 동의어다. 찌라시는 광고 전단지다. 그래서 우리는 삐라를 전단지와 혼용하고 있다.

엄격히 구분하면 삐라는 심리전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단지는 광고를 위해 나눠주는 종이쪽지라는 비교적 중립적인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이 우리 쪽으로 보내는 것은 삐라, 우리가 북쪽으로 보내는 것은 전단으로 불러왔다.

이윤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기획홍보실장(합동참모대학 명예교수, 예비역 육군 대령)이 한국군사문제연구원 발행 월간지 '월간KIMA'에 기고한 '6·25전쟁의 들리지 않던 총성 종이폭탄 삐라'란 글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삐라는 광복군이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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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625전쟁 초기 미군이 뿌린 최초의 삐라. 2020.07.09. (사진=이윤규 박사 기고문 캡처)
해방 전인 1945년 4월 김학규 장군이 지휘하던 광복군 제3지대가 미군 미국전략사무국(OSS)과 함께 작성한 4쪽짜리 삐라를 한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살포했다.

삐라 제목은 '일본 군수공장에서 피땀 흘리시는 동포에게'였다. 내용은 한국인 노동자에게 태업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흙, 쇳가루, 모래를 기계 회전부에 뿌려 기계 가동을 중지시키라는 내용이 담겼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 주장을 뒷받침하는 삐라가 북한 지역에 뿌려졌다.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이 1948년 8월28일 '봉화'라는 제목의 신문형 전단에서 "대통령께서 북진명령만 내리면 아침을 먹고 38선을 출발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공비소탕은 엿먹기, 평양 점령은 하루에"라고 주장했다. 이 삐라는 북한의 신천과 해주 지역에 살포됐다. 이 삐라는 북침설의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6·25전쟁 때 삐라가 처음 뿌려진 시점은 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2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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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안전보증서 삐라. 2020.07.09. (사진=이윤규 박사 기고문 캡처)
미국 극동지역 사령부 374공군수송부대가 남한 지역에 "국제연합회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게 귀국을 원조하도록 요청했으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원조하겠습니다. 견고, 침착하며 맹렬히 적을 대항하십시오. 우리는 한국과 힘을 합해 침략자를 귀국으로부터 격퇴하겠습니다"란 내용의 삐라를 뿌렸다. 이 삐라는 영문 타자와 펜글씨로 제작됐다.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격려 메시지가 담긴 삐라도 이어서 살포됐다.

6·25전쟁 당시 삐라는 주로 헬기, 공군수송기, 대포로 살포됐다. 유엔군과 국군이 제작한 삐라는 1000여종, 약 25억장에 달한다. 1000여종 중 북한군과 중공군을 대상으로 한 대북삐라가 660종이었다. 나머지 340종은 우리 국민과 유엔군, 국군을 대상으로 살포됐다.

이에 비해 북한군은 370여종, 약 3억장만 뿌렸다. 북한군이 살포한 삐라가 적은 이유는 유엔군은 삐라를 인쇄해 대량 살포한 반면 북한군은 펜글씨로 만화 형식 삐라를 제작해 대량 인쇄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삐라의 효과는 상당했다. 당시 삐라는 '들리지 않는 총성'이자 '종이폭탄', '심리전의 보병'이라고 불렸다. 미국 4심리전단이 6·25전쟁 포로 2728명을 심문한 결과 904명이 심리전 영향으로 항복했으며 이들 중 561명이 삐라를 보고 항복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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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한미 갈등 조장 대남삐라. 2020.07.09. (사진=이윤규 박사 기고문 캡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전황 보도 삐라가 인천과 서울에 200만장 뿌려졌는데 북한군 13사단 참모장 등 104명이 이 전단을 소지하고 항복했다. 항복한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삐라를 보고 인민군이 더 이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공포감에 항복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엔군은 공습 전에 주요 공습예정지역에 공습사실을 알리는 공습예보 삐라를 살포했다. 이 삐라는 공습예보지역을 이탈하려는 민간인과 이를 막는 북한군간 갈등을 조장시켰다. 미그기를 몰고 내려오면 5만 달러 현상금을 준다는 삐라는 북한군 공군 전투기 출격 횟수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 초기 대북삐라에는 김일성의 불법 남침 사실과 유엔군이 지원돼 곧 전선이 회복된다는 내용이 많았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반격할 때는 적에게 패전이 임박했다고 알리며 투항을 권고하는 문구, 북한 주민들은 유엔군에 작전 협조를 하라는 문구 등이 담겼다. 전쟁 막바지 고지 쟁탈전과 휴전회담 때는 향수심을 자극하며 투항하라는 내용이 많았다.

반면 대남삐라는 대부분 "국군은 미군의 용병이다. 총알받이다. 빨리 전선 이탈하거나 투항하라. 미군과 정치 지도자들은 호화판으로 지내고 있다. 너의 부모 형제는 굶어죽고 있다" 등 한미와 계층별 갈등을 조장하는 내용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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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대북삐라. 2020.07.09. (사진=이윤규 박사 기고문 캡처)
6·25전쟁 후에도 북한의 대남삐라는 1961년부터 2000년 4월까지 3543여종, 약 10억장이 살포됐다. 1979년 10·26, 12·12사태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이어지는 시기에 200종이 살포됐다. 내용은 주로 남한 지도자 비방, 남한 사회상 비방, 북한체제 선전·우상화 등이었다.

대북삐라도 2000년까지 매년 100여종씩 살포됐다. 내용은 대한민국 체제 우월성 홍보, 북한 우상화 비판, 북한 주민생활 궁핍성, 월남 귀순 권고 등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대남삐라가 대북삐라보다 공세적이었고 살포량도 많았다. 그러나 1980년도 후반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로 공산주의 체제 선전에 어려움이 생기고 고난의 행군 등 경제난까지 겹치자 대남삐라뿐만 아니라 대남확성기 방송도 급감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접경지역 심리전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북한은 사이버 심리전, 조선중앙TV 방송, 조직공작팀 등으로 수단을 바꿔 지금도 대남심리전을 지속했다. 우리 쪽에서도 대북삐라 살포가 재개됐다. 북한을 탈출한 일부 탈북민이 북한 주민을 각성시켜 김정은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며 2004년께부터 남북 접경지역에서 대북삐라를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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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뉴시스】이종구 기자 = 북한이 경기 연천 지역에 10일 오후 4~5시 사이 두 차례에 걸쳐서 풍선에 매달린 대북 전단(삐라)을 향해 14.5mm 고사총 60 여발을 발사했다.  사진은 북한군이 쏜 수십여발 가운데 한발이 연천 중면 면사무소 앞 마당에 박혀 있는 모습. 2014.10.10. leejg@newsis.com
대북삐라는 남북 간 무력 충돌을 유발했다.

2014년 10월10일 탈북민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이 통일전망대 부근에서 대북삐라 20만장을 살포하고 다른 탈북민단체 역시 연천군 야산에서 132만장을 보내려 하자 북한은 전단이 실린 기구를 향해 14.5㎜ 고사총을 발사했다. 이 총탄이 연천군 중면사무소 인근에 떨어지자 우리 군도 K-6 중기관총 40여발을 비무장지대 북측 감시초소(GP)를 향해 발사했다.

삐라로 인한 무력 충돌은 한반도뿐 아니라 쿠바에서도 발생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따르면 1996년 2월24일 '구호를 위한 형제단(Brothers to the Rescue)' 소속 비행기가 쿠바 영공에서 카스트로 정권을 비난하는 삐라를 살포하던 중 쿠바 공군기에 의해 격추됐다. 구호를 위한 형제단은 호세 바술토(Jose Basulto)라는 인물이 주도하는 비영리 우익단체다. 쿠바 탈주민들에 의해 결성된 이 단체는 쿠바 정부와 피델 카스트로를 규탄해왔다.

비행기 격추 후 미국은 쿠바자유민주연대법을 제정해 쿠바에 대한 제재를 강화했다. 헬름스-버튼법이라고도 알려진 이 법은 쿠바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강화해 쿠바 내부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은 세컨더리 보이콧(제재 대상 국가와 거래한 제3국 기업들을 일괄 제재하는 것)을 적용해 제3국의 개인과 단체도 제재 대상으로 분류했다. 삐라 살포 비행기 격추와 이로 인한 경제재재 등으로 악화된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이후 상당기간 동안 개선되지 못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daer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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