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클로즈업 필름]영혼을 구원하는 연기…'레슬리에게'

등록 2023.11.29 06:16:00수정 2023.12.04 10:53:41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클로즈업 필름]영혼을 구원하는 연기…'레슬리에게'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펍이 문 닫을 시간까지 잔뜩 술을 마신 레슬리(앤드리아 라이즈버러)는 자리를 뜨기 전 흘러나오는 노래 한 곡을 듣는다. 윌리 넬슨의 'Are You Sure'. 이 노래는 읊조리듯 이렇게 시작한다. "주위를 봐요/바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봐요/그 얼굴들에서 뭐가 보이나요/당신은 정말 여기 있고 싶은가요" 조용히 노랫말을 음미하던 레슬리는 홀로 중얼거린다. "이거 내 얘기야?" 영화 '레슬리에게'는 마치 서글픈 컨트리 음악 같다. 기타 연주 하나에 목소리를 얹은 듯 소박하지만, 그런 노래가 대개 노랫말과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멜로디만으로 온통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처럼 이 영화 역시 대단한 기교 하나 없이도 관객을 울린다.

'레슬리에게'는 제목 그대로 레슬리에 관한 이야기. 6년 전 복권에 당첨돼 19만 달러를 받게 됐지만, 현재 레슬리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월세 낼 돈이 없어 모텔에서마저 쫓겨난 그는 노숙 생활을 하다가 사실상 연을 끊고 지낸 아들 제임스(오언 티그)를 찾아간다. 알콜 중독인 레슬리는 아들에게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제임스 친구의 돈까지 훔쳐가며 술을 마시다가 아들에게도 버림 받고 강제로 고향에 가게 된다. 당첨금을 술로 탕진하고 아들까지 내팽개친 레슬리를 고향 사람들은 무시하고 비웃는다. 그럼에도 술을 끊지 못한 레슬리는 이번엔 오랜 친구 집에서마저 쫓겨나고, 다시 노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 마지막일 듯한 행운이 찾아온다.
[클로즈업 필름]영혼을 구원하는 연기…'레슬리에게'


'레슬리에게'가 컨트리 음악이라면 레슬리를 연기한 배우 안드레아 라이즈버러는 그 음악의 노랫말이자 목소리이고 멜로디다. 라이즈버러는 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삶의 나락에서 도무지 헤어나오지 못하는 레슬리를 회한과 슬픔에 속에 잠식당한 듯한 눈빛으로 담아낸다. 그러면서도 너무 나약해서 자기 의지만으로는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다가 매번 무너지고마는 이 여자를 악다구치 치는 위악으로 그려간다. 레슬리는 아들에게 호소한다. "엄마는 널 정말 사랑한단다." 그러면서도 자기 연민에 급급하다. "난 아픈 거라고." 악에 받친 그는 오랜 친구 탓을 한다. "그때 너라도 날 말렸어야지." 그러나 레슬리는 결국 친구에게 말하고 만다. "고마워."

'버드맨' '빌리 진 킹:세기의 대결' 등에 조연으로 출연하긴 했지만, 라이즈버러는 국내 관객에게 익숙한 배우는 아니다. 다만 '레슬리에게'를 보고 나면 이 배우를 한동안 잊기 어려울 것이다. 레슬리가 펍에서 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시는 그 얼굴엔 마치 이 여자가 지나온 곡절 많은 삶 전체가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레슬리의 앙상한 몸에 미국 텍사스 서부 외곽 도시의 황량한 풍경이 더해지면 그 모습은 마치 쓸쓸한 시 한 편이 된다. 라이즈버러는 이 연기로 올해 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상을 받은 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양쯔충이었으나 라이즈버러가 받았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는 게 전 세계 평단의 공통된 생각이다.
[클로즈업 필름]영혼을 구원하는 연기…'레슬리에게'


'레슬리에게'가 라이즈버러의 원맨쇼인 것만은 아니다. 마이클 모리스 감독은 이 작품이 장편극영화 데뷔작인데도 담백하면서도 힘 있는 연출력을 보여준다. 대단한 사건 하나 벌어지지 않은 채 2시간 가량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레슬리의 행보를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이끌어가며 긴장감을 유지하는 능력은 앞으로 그가 만들 영화를 기대하게 한다. 모리스 감독은 앞서 '루머의 루머의 루머' '베터 콜 사울' 등 유명 TV 시리즈를 연출해왔다. 라이언 비나코 작가가 쓴 각본은 치밀하고 생생해서 레슬리 같은 사람이 마치 어딘가에 있을 법한 느낌을 준다. 비나코 작가는 실제 알콜 중독자였던 어머니를 참고해 레슬리 캐릭터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레슬리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닌 인정과 사랑이다.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고 아들마저 내팽겨친 이 어리석은 인간은 당연히 자기 자신을 지독하게 경멸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못난 나라도 지지해줄 단 한 사람을 원한다. 레슬리는 말한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줘요."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줄 수 있어요?" 이런 그에게 찾아온 마지막 당첨 복권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다가 가까스로 삶을 재건한 뒤 그걸 지켜가기 위해 안간힘 쓰는 이들의 도움이다. 이제 레슬리는 다시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삶의 유일한 이유이자 절대 잊을 수 없는 아들과 재회한다. '레슬리에게'의 마지막 장면에선 패티 그리핀이 부른 'Angels Are Falling'이 흘러나온다.

"내 영혼을 구하려고 밤새 달렸지/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예수를 만났네/아침마다 밀려오는 후회/침대 위에 누운 악담을 퍼붓네/천사들이 나에게 내려와/천사들이 계속해서 나에게 내려와"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