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플레이브, 스타디움 수놓은 찬란한 광기…40대 아저씨, 끝내 '플리'가 됐네요

등록 2026.09.14 15:45:07

12~13일 인천문학경기장 주경기장서 첫 월드투어 '킵 잇 매닉' 출발

가상과 실재 경계 허문 120m 초대형 LED와 'Z축의 기적'

[인천=뉴시스] 플레이브 인천 콘서트. (사진 = 블래스트 제공) 2026.09.14.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뉴시스] 플레이브 인천 콘서트. (사진 = 블래스트 제공) 2026.09.14.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뉴시스]이재훈 기자 = "40대 아저씨인 저는 플리(PLLI)는 아닙니다."

2년 전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팬 콘서트를 보고 처음 썼던 문장입니다. 이후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과 고척스카이돔을 거치며 '플리에 한결 더 가까워졌다'고 고백했으나, 지난 12~13일 인천문학경기장 주경기장에서 펼쳐진 '2026 플레이브 월드 투어 '킵 잇 매닉'(2026 PLAVE WORLD TOUR 'KEEP IT MANIC')'의 거대한 함성 속에 서 있던 저는 결국 그 유예의 문장을 완전히 거둬들여야 했습니다.

초가을 밤바람이 스치는 탁 트인 스타디움 객석, 수만 개의 덤벨봉이 파도치듯 일렁이는 광경 속에서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가상과 실재의 경계를 따지는 일은 이 거대한 공명 앞에서는 무력한 도식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40대 아저씨는 이제 부인할 길 없이, 이 놀라운 세계의 한복판에 깊숙이 연루돼 있었습니다.

기술의 극치에서 피어난 '존재론적 역설'

흔히 버추얼 아티스트에게 스타디움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리적 신체를 지닌 인간만이 그 광활한 야외 공간의 공기를 장악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플레이브와 제작사 블래스트는 인천문학경기장 역사상 최대 규모인 가로 120m 이상, 세로 20m 이상의 초대형 LED를 세워 올려 그 편견을 단숨에 전복했습니다.

공연장이 커질수록 스크린 안의 존재가 더 선명해지고 친밀해진다는 플레이브만의 역설은 스타디움에서 극대화됐습니다. 스크린은 단순한 영사 장치가 아니라 현실과 아스테룸(플레이브의 세계관)을 매개하는 거대한 건축적 구조물이었습니다. 무대 위로 실제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고, 오프닝 VCR의 활시위가 밤하늘을 가르며 곧바로 첫 곡 '여섯 번째 여름'으로 이어지는 순간, 공간 전체는 하나의 압도적인 미디어아트 쇼로 탈바꿈했습니다.

이 경이로움의 밑바탕에는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블래스트의 집요한 R&D 투자가 있습니다. 실시간 모션캡처 기술은 이제 멤버들의 미세한 호흡, 춤선 끝의 잔향, 손가락 마디의 떨림까지 자연스럽게 구현해 냅니다. 기술에 온몸을 던져 투자하지 않는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기술은 그릇일 뿐, 본질은 그 안을 채우는 다섯 멤버의 압도적인 음악성과 땀방울입니다. 기술적 성취가 휴머니즘을 앞지르지 않고, 오히려 멤버들의 실력을 가장 투명하게 증명하는 통로로 작동할 때 비로소 관객은 거부할 수 없는 몰입의 체험으로 진입합니다.
[인천=뉴시스] 플레이브 인천 콘서트. (사진 = 블래스트 제공) 2026.09.14.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뉴시스] 플레이브 인천 콘서트. (사진 = 블래스트 제공) 2026.09.14.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매닉(MANIC)', 상처와 한계를 돌파하는 결핍의 윤리

이번 투어의 타이틀인 '킵 잇 매닉(KEEP IT MANIC)'은 '미친 듯한 열기와 에너지를 멈추지 않고 이어간다'는 선언입니다. 대중음악에서 광기(Manic)는 종종 무절제한 폭주로 소비되지만, 플레이브가 무대 위에서 보여준 광기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결핍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처절할 정도로 단단한 윤리적 에너지였습니다.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존재는 태생적으로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다'는 존재론적 결핍을 안고 출발합니다. 어떤 비평적 시선에서 사랑이란 결함 없는 완벽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결핍과 아픔을 정확하게 알아채고 그 빈자리를 자신의 온기로 메워주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플레이브를 향한 팬덤의 유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폭발합니다. 가상의 껍질 뒤편에서 마이크를 쥐고 숨을 헐떡이며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본체의 실존, "홍대에서 버스킹할 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하던 일"이라며 스타디움 바닥을 향해 엎드려 큰절을 올리는 다섯 청년의 진심을 마주할 때, 플리는 그들을 '완벽한 가상'이 아니라 '상처를 딛고 피어난 가장 뜨거운 인간'으로 껴안습니다.

'매닉'은 바로 그 불가능한 간극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태도입니다. 은호의 날카로운 자작 랩으로 포문을 열어 록 버전으로 거칠게 포효한 '버추얼 아이돌'과 '대시(Dash)', 실제 댄서들과 가상의 멤버들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합을 맞춘 '본 새비지(Born Savage)'는 그 광기의 정점이었습니다. 가상이라서 조롱받았던 편견을 음악적 완성도로 정면 돌파하겠다는 그 결기 어린 에너지는 객석을 단순한 열광을 넘어선 숙연한 카타르시스로 이끌었습니다.

상상력의 해방, 그리고 세대를 관통하는 서정

버추얼이기에 가능한 무대 미학은 멤버별 솔로 무대에서 찬란하게 개화했습니다. 예준은 '클로즈 투 유(Close to you)'에서 영화 '라라랜드'의 한 장면 같은 서정적 감수성을 수놓았고, 은호는 '테이스트(TASTE)'에서 욕조와 관능적인 안무를 통해 성숙한 서사를 구축했습니다. 하민은 '스파이더(Spider)'의 정교한 거미줄 안무로 공간을 지배했으며, 노아는 관에서 깨어나는 뱀파이어 콘셉트의 '굿 보이 건 배드(Good Boy Gone Bad)'로 드라마틱한 연출을 선보였습니다. 밤비는 '셜록(Sherlock)' 무대를 홀로 채우며 스타디움 전체를 휘어잡았습니다. 물리적 무대 장치의 제약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구현이었습니다.
[인천=뉴시스] 플레이브 인천 콘서트. (사진 = 블래스트 제공) 2026.09.14.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뉴시스] 플레이브 인천 콘서트. (사진 = 블래스트 제공) 2026.09.14.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동양적 미감을 현대적으로 직조한 '왓치 미 우(Watch Me Woo)!'와 '리즈(Rizz)'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규모 크루 댄서들의 군무와 호랑이 연출, 실시간 부채 퍼포먼스가 어우러지며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했습니다.

그 화려한 외양 속에서도 이들의 뿌리는 여전히 아날로그적 정서에 닿아 있습니다. 댄서 크루 훅(HOOK)의 안무가 돋보인 '그런 것 같아'와 '우리 영화', 그리고 깜짝 공개된 미발매곡까지 관통하는 멜로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가요 황금기를 기억하는 40대의 가슴을 뭉클하게 건드립니다. 12일 공연 중 펼쳐진 예준의 깜짝 생일파티, 그리고 앙코르 마지막 곡 '기다릴게' 발라드 버전 위로 터져 오른 불꽃놀이는 그들이 지나온 서사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끝내 완성된 Z축의 기적

제가 고척돔 공연에서 언급했던 X축(무대), Y축(함성), 그리고 그 둘을 관통하는 Z축(진심)의 조화는 스타디움의 밤하늘 아래에서 마침내 하나의 견고한 우주가 됐습니다. 냉소와 가벼움이 범람하는 시대에, 무언가를 이토록 투명하고 열렬하게 사랑하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눈부신 미학적 순간입니다.

인천을 시작으로 카나가와, 가오슝, 방콕, 싱가포르, 타이베이, 마카오, LA로 이어지는 첫 월드 투어의 대장정은 기술의 과시가 아니라 진심의 번역 과정이 될 것입니다.

공연이 끝나고 문학경기장을 빠져나오는 길, 여전히 가시지 않는 귀소의 여운 속에서 문득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광기 속에서, 40대 아저씨는 이제 플리가 아니라고 말할 핑계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