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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의 원류] 삼성신화에서 '제주이민'까지…제주를 만든 개방성

등록 2026.09.15 08:00:00

신화 속 세공주, 오곡·가축과 함께 바다 건너 새로운 문화 전해

고산리·탐라 유적 곳곳에 남은 외부 교류와 이동의 흔적

몽골 목호·조선 유배인·전쟁 피난민…시대마다 사람, 문물 유입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도심에 위치한 삼성혈. 13일 오후 아름드리 녹나무 사이로 세 신인이 솟아났다는 혈이 보였다. 2026.09.15.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도심에 위치한 삼성혈. 13일 오후 아름드리 녹나무 사이로 세 신인이 솟아났다는 혈이 보였다. 2026.09.15. [email protected]


제주는 오랫동안 '변방의 섬'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제주문화의 깊은 층위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동아시아 해역을 잇던 해상교류의 거점이었으며 제주 사람들은 화산섬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돌과 바람, 불과 흙을 다루며 고유한 생활문화를 일궈왔다. 문헌과 유적, 생활문화와 구술, 자연환경과 생업의 흔적을 따라가며 제주가 지닌 독창성과 개방성을 살펴보고 문화콘텐츠로 확장될 가능성을 함께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13일 오후 제주시 도심 한복판에 있는 삼성혈은 바깥의 소음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숲으로 들어가자 아름드리 녹나무 두 그루가 마치 호위무사처럼 굵은 줄기를 세우고 삼성혈을 지키고 있었다. 두 나무의 가지가 머리 위로 넓게 뻗어 하늘을 가리고, 그 사이로 고을나·양을나·부을나가 솟아났다고 전하는 세 개의 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 지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흙 속으로 움푹 들어간 혈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나무와 돌담, 낙엽이 내려앉은 경내에서는 제주사람들이 이곳을 자신들의 시원(始原)을 간직한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온 흔적이 묻어난다.

삼신인(三神人)은 땅에서 솟아났지만 이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바다 건너에서 왔다. 삼성신화를 전하는 고려사 지리지 탐라현은 '개석함 출현청의처녀삼 급제구독오곡종(開石函 出現靑衣處女三 及諸駒犢五穀種)'이라고 기록했다. 돌함을 열자 푸른 옷을 입은 세 여인과 망아지·송아지, 오곡의 종자가 나왔다는 뜻이다.

삼신인은 세 여인과 혼인한 뒤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에 터전을 정하고 오곡을 심어 소와 말을 길렀다. 이는 수렵 중심 사회가 농경·목축사회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주문화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삼성신화부터 이미 토착과 외래, 정착과 이주의 만남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반복되는 '밖에서 온 존재'

신화적 요소를 걷어내면 삼신인 역시 외부에서 제주로 이동한 집단의 흔적이라는 학설도 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고을나·양을나·부을나를 고구려·양맥·부여 계통 이주집단의 수장으로 해석했다. 고·양·부를 특정 북방계 집단과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하나의 학설이지만, 탐라사회 형성에 여러 이주집단이 참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 탐라사 연구 역시 한 계통의 집단만으로 제주사회의 형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김동전 제주대 교수는 "예맥 등 고구려계통과 마한 등 백제계통, 변한·진한 등 신라계통 사람들이 시기를 달리해 제주에 들어와 기존 주민과 결합하면서 탐라사회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외부에서 온 존재가 새로운 문화를 가져오는 이야기는 제주 무속신화에서도 확인된다.

송당본풀이의 백주또는 외부에서 제주로 들어와 수렵신인 소천국과 결합하고 농경문화를 전하는 존재다. 세경본풀이의 자청비 또한 다른 세계에서 곡종을 가져와 인간 세상에 농사를 전한다. 매년 음력 2월 제주를 찾아오는 영등할망 역시 바다 밖에서 들어오는 풍요신으로, 제주사람들은 영등굿을 통해 이 외래의 신을 맞아 풍요와 생업의 안녕을 기원해왔다.

제주 신화에서 '밖'은 낯선 공간인 동시에 새로운 사람과 곡식, 기술과 지식이 들어오는 통로였던 셈이다.

선사시대부터 열린 바닷길

고고학에서도 제주가 고립된 섬만은 아니었다는 흔적이 확인된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유적에서는 약 1만년 전의 고산리식토기와 세석기 등이 나왔으며, 일부 석기의 재료가 제주에 없는 점도 흥미롭다. 이 가운데 일부 유물은 아무르강 중·하류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초기 신석기문화와 유사성을 보여준다.
[제주=뉴시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신석기 유적지에서 출토된 석기. (사진=국립제주박물관 도록에서 캡처)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제주=뉴시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신석기 유적지에서 출토된 석기. (사진=국립제주박물관 도록에서 캡처)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이를 곧바로 아무르강 사람들이 제주로 이동했다는 증거로 볼 수는 없지만, 제주 초기 정착문화를 동북아시아의 사람과 문화 이동이라는 넓은 틀에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탐라시대가 되면 대외교류의 흔적은 더욱 분명해진다. 3~5세기 제주에서 나온 외래계 토기의 상당수는 마한계이고 일부 소가야계 토기도 확인된다.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은 "탐라가 전남 서남부의 마한세력과 남부 가야권을 잇는 교역망 속에서 철과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토기 하나가 곧 한 부족의 이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러 지역의 토기와 철기, 화폐와 장신구가 제주에서 함께 발견된다는 사실은 탐라가 하나의 닫힌 문화권에서만 성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역사시대로 들어오면 외부인의 이동은 더욱 구체적이다. 원은 삼별초가 진압된 뒤 제주를 말 생산기지로 활용했다. 1276년에는 몽골마 160필과 말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목호를 제주에 보내 방목을 시작했다. 이후 목호의 난이 진압된 1374년까지 약 100년 가까이 몽골 세력이 제주 목축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 시기 제주에 건너온 것은 사람과 말만이 아니었다. 목축기술과 목장 운영방식, 생활문화가 함께 전해졌다. 외래문화가 제주에 들어와 지역의 환경과 기존 생산방식 속에서 변화하며 정착했다.

조선시대에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났다. 조정은 제주 인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1629년 출륙금지령을 내렸고, 이 조치는 1823년까지 약 200년 이어졌다. 제주사람의 육지 이동은 제한됐지만 외부인이 제주로 들어오는 길까지 막힌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배인이었다. 홍기표 전 제주역사문화진흥원장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된 사람은 모두 702명으로 확인된다. 제주목 297명, 대정현 192명, 정의현 122명, 추자도 91명이다. 유배는 형벌이었지만 중앙의 학문과 지식, 문화를 제주로 옮기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유배인들은 제주 사람들과 학문을 논하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일부는 제주에 정착해 새로운 가문의 입도조가 됐다.

제주사람에게는 밖으로 나가는 길을 막았지만 중앙에서는 끊임없이 사람을 제주로 내려보낸 셈이다.

20~21세기 피난민에서 '제주살이'로 이어진 이동

20세기 제주가 경험한 가장 큰 인구 유입 가운데 하나는 한국전쟁이었다. 1951년 3월 제주에 머문 피난민은 7만1228명이었지만 불과 두 달 뒤인 5월에는 14만8794명으로 늘었다.
[제주=뉴시스]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모슬포(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열린 피난민 등의 예배 모습. (사진=제주기독교 100년사에서 캡처)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제주=뉴시스]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모슬포(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열린 피난민 등의 예배 모습. (사진=제주기독교 100년사에서 캡처)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당시 제주 인구와 비교해도 상당한 규모였다. 상당수는 전쟁이 끝난 뒤 떠났지만 일부는 제주에 남아 교육·종교·상업·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제주사회와 관계를 맺었다.

1960년대 이후 감귤산업의 부흥은 또 다른 이주를 불러왔다. 특히 호남 출신 사람들이 생계와 일자리를 찾아 제주로 많이 들어왔다.

1960~70년대 제주항 인근에는 해남 출신 주민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해남촌’이 형성됐다. 호남 이주민들은 부두와 건설현장에서 일했고, 서귀포와 성산 등으로 이동해 감귤원 조성과 수확에도 참여했다.

제주 감귤밭은 1960년대부터 급속히 늘어 1970년대 중반에는 1만㏊를 넘어섰다. 돌과 잡목을 걷어내 감귤원을 만들고 수확·운반하려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현장에는 제주사람뿐 아니라 바다를 건너온 이주민들이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제주로 향하는 사람들의 이동은 계속됐다. 다만 이유가 달라졌다. 과거 이주가 주로 생계와 일자리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귀농·귀촌과 창업, 문화·예술 활동, 자녀교육, 기업 이전,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아 제주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도 원도심과 동부지역 전경. (사진=뉴시스DB)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도 원도심과 동부지역 전경. (사진=뉴시스DB) [email protected]


본격적인 변화는 2010년대에 나타났다. 제주는 2010년 437명의 순유입을 시작으로 2014년 순유입 인구가 1만명을 넘어섰고, 2016년에는 1만4632명으로 정점을 기록했다. '제주살이', '제주이민'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이주는 하나의 사회현상이 됐다.

최근에는 주거비와 생활비 상승, 일자리 문제 등이 겹치면서 순유입이 감소하고 제주를 떠나는 사람이 더 많은 해도 나타나고 있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하나의 흐름은 분명하다.

삼성신화에서는 세 여인이 오곡과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바다를 건넜고, 선사시대부터 주변 지역의 사람과 물자가 제주를 오갔다. 탐라는 여러 지역과 교류했고 몽골의 목호와 조선의 유배인, 한국전쟁 피난민과 감귤 부흥기의 호남 이주민을 거쳐 2000년대에는 새로운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제주를 찾았다.

사람이 이동할 때 곡식과 가축, 농경과 목축기술, 학문과 예술, 노동과 새로운 생활방식이 함께 들어왔다. 제주문화는 외부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섬의 자연환경과 기존 생활방식에 맞게 다시 만들어왔다.

제주문화의 원류를 따라가면 고립과 폐쇄보다 이동과 만남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서로 다른 사람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제주방식으로 재구성한 개방성과 다양성은 오늘의 제주문화를 형성한 중요한 힘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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