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 시리즈', 완고한 권위의 박제를 깬 유쾌한 틈새
등록 2026.10.30 14:51:29
가부장의 엄숙주의를 간질인 허무의 수사학
스스로 박제를 깨고 길어 올린 온기
![[서울=뉴시스] 최불암 홍상원 CF. (사진 = 유튜브 캡처)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6/10/30/NISI20261030_0002278696_web.jpg?rnd=20261030142023)
[서울=뉴시스] 최불암 홍상원 CF. (사진 = 유튜브 캡처) 2026.10.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1990년 붉은색 스웨터를 입은 배우 최불암이 인삼 음료 광고에서 건넨 이 한마디는 단순한 카피를 넘어 한 시대의 시각적 기표로 자리 잡았다.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다 단속에 걸린 그가 "빨간색이 좋아져서…"라고 능청을 떨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자연스레 따라붙을 만큼, 완고하던 '국민 아버지'의 외피에 생긴 틈새는 대중의 무의식 속에 빠르게 번져나갔다.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을 휩쓴 단편 유머집 '최불암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가 지나온 엄숙주의의 퇴장을 알리는 무구하고도 날카로운 전복이었다. 당시 최불암은 MBC TV 드라마 '수사반장'의 정의로운 박 반장이자 MBC TV '전원일기'의 김 회장으로, 도덕성과 유교적 질서를 대변하던 '신화적 거인'이었다.
하지만 87년 체제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의 태동과 함께 거대 담론의 억압이 걷히자, 청년 세대의 유머는 직접적인 권력 대신 일상의 가부장적 권위를 겨누기 시작했다.
유머의 묘미는 구체적인 서사 속에서 권위가 허물어지는 '배반의 순간'에 있었다. '최불암 시리즈'에서 배가 고파 찾아간 고향 식당에서 반찬도 시고 국도 셔 화가 난 최불암이 "아주머니, 음식들이 왜 다 신 겁니까?"라고 묻자 "고향의 맛은 다시다"라는 답이 돌아오는 식이다. 광고 속 신성한 표어로 박제돼 있던 향수는 허무맹랑한 동음이의어의 말장난으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다'의 광고 모델은 '전원일기'에서 최불암과 부부로 호흡을 맞춘 배우 김혜자였다.
또 다른 최불암 시리즈에서 최불암은 이사를 마친 날 중국 음식을 시켜 먹자는 김혜자가 두 글자 메뉴만 고르라고 핀잔을 주자 잠시 망설이다 "그럼 난 탕슉"을 외친다. 까치발을 든 꼬마가 십여 차례 폴짝 뛰어 간신히 남의 집 초인종을 눌러주자 "야, 튀어!"라며 도망치는 시리즈 속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덕률의 화신이 순식간에 철부지 어린아이의 장난기를 보여주는 광경은 숨 막히던 일상 속에서 무해한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이 거대한 패러디가 파괴적인 냉소나 조롱으로 흐르지 않고 따스한 서사로 귀결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대상이 된 최불암 자신의 태도 덕분이었다. 그는 대중의 장난에 불쾌해하는 대신 스스로 책을 엮으며 그 웃음의 장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가 훗날 강연에서 직접 소개한 '63빌딩 탁구' 일화는 이 시리즈의 함의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유인촌과 옥상에서 탁구를 치다 강풍에 빌딩 밖으로 날아간 공을 잡으려 뛰어내려간 최불암이 30분 만에 기어 올라와 헐떡이며 내뱉은 한마디. "1대 0."
최불암은 이를 두고 "언제나 '내가 이겼다, 네가 졌다'며 싸우는 세태와 비교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대단한 승리가 있을 것처럼 긴장을 잔뜩 끌어올려 놓고 툭 바람을 빼버리는 허무의 수사학 뒤편에는, 사소한 승패에 매몰된 인간사의 부조리를 관조하는 묵직한 삶의 성찰이 도사리고 있었다.
홍삼원의 붉은 온기처럼, 완고한 아버지의 옷을 벗고 틈새를 내보인 그의 위트는 '국민 아버지'라는 무거운 상징을 한층 더 유연하고 온화하게 조련해 냈다. 최불암 시리즈는 묵직한 시대의 빗장을 스르륵 풀며 터져 나왔던 가장 지혜롭고 인간적인 안도의 탄식이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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