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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에 대한 숭고한 고민···연극 '1945'

등록 2017.07.08 07: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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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연극 '1945'. 2017.07.07. (사진 = 국립극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1945'. 2017.07.07.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우리 모두 고통을 겪었어요. 더러운 진창을 지나온 겁니다. 지옥을 건너온 거예요. (···) 진창에 더 깊숙이 빠진 게, 더 새까맣게 그을린 게 이 여자들 잘못은 아니잖아요. (···) 그런데 다시 저 여자들을 진창 속에 밀어넣구 가자구요? 우리가 씻어줘야죠. 그 고통을. 지옥에서 건져내야죠."(영호)

"당신이 뭔데, 우릴 데려가구, 버리구 한다는 거야? 씻어 줘? 우리가 더럽다구? 아니. 우리 더럽지 않아. 누가 누굴 보고 더럽다는 거야! 이 아이도, 나도. 깨끗해. 더러운 건 우릴 보는 당신, 그 눈이지. 씻으려면 그걸 씻어야지. 하지만 아무리 씻어도 안 될 거야."(명숙)

1945년 광복 직후 만주. 명숙은 일본군 위안소에서 지옥을 함께 경험한 일본인 미즈코와 기차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벙어리 동생이라고 다른 조선인들에게 속인다. 하지만 결국 들통이 나고 다른 조선인들은 그들을 더럽다고 여긴다. 영호는 그녀들을 위하는 듯하지만 결국 자기 방식으로 위로하는 나르시시즘에 물든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 5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의 연극 '1945'는 연극 자체를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끼게 한다.

현재를 대표하는 희곡작가인 배삼식이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인데 그가 평소 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작품 전체의 기조에 배어 있다.

1945년 해방 직후 만주. 이곳에 살다 전재민(戰災民) 구제소에 머물며 기차를 타고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는 조선 사람들은 해방으로 이른바 다시 영점지대가 된 그 시대의 혼란을 그대로 머금고 있다.
【서울=뉴시스】 연극 '1945'. 2017.07.07. (사진 = 국립극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1945'. 2017.07.07.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일제강점기는 누구도 원죄에서 피해갈 수 없게 만들었다.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 그리고 그녀와 함께 죽을 고비를 같이 넘긴 미즈코뿐만 아니라 명숙과 미즈코를 위안소에서 괴롭힌 포주이지만 서글서글한 장수봉과 착하게 새 삶을 꾸는 선녀, 생각 속에서는 실행력이 넘치는 지식을 지녔지만 중요한 일 앞에서는 우유부단한 구원창 등 너나할 것 없이 올가미에 걸려 있고 선함과 악함을 시시때때로 오간다.

배 작가는 이런 작법을 통해 총 15명의 배역들에게 모두 생생한 입체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한다. 그다운 극적 마법인데, 이는 객석에서도 인물들을 쉽게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

섣부른 가치 판단 앞에서 망설이거나 머뭇거리게 되는데 결국 이는 작품 자체와 그 시대, 나아가 해방 전후와 다를 것 없는 지금에 대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지만 그것이 항상 정당한 일이 되는가. 온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그러기 위한 노력이 담긴 배 작가의 작품은 인간성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장이 된다.

다양한 역으로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김정민이 이명숙, 일본 극단 시키를 거쳐 현재 경기도립극단 단원으로 활동 중인 이애린이 미즈코를 맡았는데 두 사람 외에 선녀 역의 김정은, 수봉 역의 박윤희, 삶에 대한 집착을 처절하면서도 아련하게 보여준 끝순 역의 이봉련 등 누구하나 빠질 것 없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은 캐릭터를 잘 살려냈다.

【서울=뉴시스】 연극 '1945'. 2017.07.07. (사진 = 국립극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1945'. 2017.07.07.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대본의 본질을 과장없이 담백하게 올린 류주연 연출, 무대에 옮기면서도 무대를 비우고 배우들의 연기로 채움으로써 오히려 무대를 빛나게 만든 박상봉 무대 디자이너의 공도 크다.

현재 불과 올해의 절반을 보냈지만 2017년 최고의 수작을 우리는 이미 만났다. 30일까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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