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미국판 된장녀? 정답없는 인생의 한순간, 영화 ‘블루 재스민’

이번 작품에서 우디 앨런이 주목한 지점은 입양된 두 자매의 대비된 삶이다. 25일 개봉하는 ‘블루 재스민’은 어찌됐든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처지는 같지만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재스민(케이트 블랜쳇)과 그렇지 못한 진저(샐리 호킨스)의 상반된 선택을 통해 과연 어떻게 사는 게 나은지를 묻고 있다. 물론 선택의 문제일뿐 답은 없다.
언니 재스민의 표현대로 ‘루저’들만 만나며 두 어린 아들과 샌프란시스코의 지저분한 차이나타운에 살고 있는 진저는 무엇 하나 특별날 것 없는 식료품점 계산원이다. ‘엄마가 유전자가 더 좋아서 언니만 더 좋아한’ 탓에 일찍 집을 나와 독립, 노동을 하고 남자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남들 하듯이 살아왔다. 형부 때문에 잘 살게 될 기회를 잃고 이혼까지 하게 되지만 원망도 크게 하지 않고 주어진 것들에 순응하면서 정비사 새 애인(바비 카나베일)을 사귄다.
늘씬한 금발미녀인 재스민은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다가 만난 9세 연상에다 애 딸린 자산가 할(앨릭 볼드윈)과 대학을 그만둔 후 결혼해 뉴욕에서 최상류층의 삶을 산다. 맨해튼 중심가에 아파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백만장자와 유명인사들의 호화 맨션이 몰려있는 롱아일랜드 햄튼스에도 주말별장이 있다. 샤넬, 에르메스, 루이비통, 미소니, 랠프 로렌, 프라다 등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하고 비싼 보석과 액세서리를 걸치고 파티와 쇼핑을 맘껏 즐긴다.
한 마디로 극과 극의 삶. 그러나 재스민은 남편 할이 밥 먹듯 외도를 저질러 온 것을 알게 되고, 사기와 탈세로 축적해온 부가 한순간에 무너지며 빚더미에 앉게 되자 진저의 집에 신세를 지러 샌프란스시코로 오게된다. 그 와중에도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택시기사에게 100 달러짜리 지폐를 팁으로 줄만큼 쓰던 버릇을 못 버린다. 술과 우울증약, 신경안정제 등을 끊임없이 복용하면서도 자신의 급변한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난 뭔가 중요한 일을 할거야”라며 탈출구를 찾으려 애쓴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재스민은 드와이트를 잡기 위해 몇 가지 거짓말을 하고, 여기서 재스민의 본색이 드러난다. 우디 앨런은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여동생에게 ‘진저(생강)’라는 만만하고 흔한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진저백’에서 따왔다고 한다. 진저백은 페이크(가짜) 명품으로, 실용적이고 가벼운 나일론백에 프린트 기법을 이용해 마치 타조가죽, 악어가죽 등과 같은 고급소재인 것처럼 보이도록 한 핸드백이다. 가격은 진품의 100분의 1선. 에르메스의 최고급 가방인 버킨백과 켈리백을 주로 모방한다. 재스민은 당연히 진짜 버킨백을 들고 다닌다. 1000만원대를 호가하는 이 백은 한 달에 대여섯 개밖에 만들지 않아 돈이 있어도 2~3년은 기다려야 가질 수 있다는 사치품의 대명사다.
그러나 뻥튀기된 ‘가짜’ 삶을 사는 것은 재스민이었다. ‘재닛’이라는 평범한 본명을 버리고 ‘재스민’으로 개명한 그녀는 “어머니가 재스민 꽃을 좋아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재스민은 흔한 뿌리식물 생강과 대조되는 고급 향료다. 이 포장의 의도에 악의는 없었겠지만 전 남편 할도 재스민이라는 이름에 반했다고 할 정도로 그녀의 ‘있어 보이기’ 전략은 꽤 성공적이다. 이런 사소한 설정들이 우디 앨런의 예리한 관찰력을 드러낸다. 흔히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 더 나은 이성을 만나기 위한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주변에 꽤 있다. 공작의 날개펴기나 목도리도마뱀의 목도리를 펼쳐 보이기처럼 동물적 본능으로 자신의 몸집을 부풀려 보이려는 것이다. 이러한 속물기질은 꽤 괜찮은 생존전략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외교부를 그만 둔 후 정계진출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드와이트에게 이런 ‘허위 사실’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훗날의 일이지만 정직성과 청렴성을 까다롭게 요구하는 미국 정계에서 그녀의 과거가 들통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여기서 재스민의 어리석음이 드러난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를 외면해 버리려하는 일종의 자기기만, 타조증후군이다. 정말 재스민은 전 남편 할이 외도와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몰랐을까. 불안 위에 얹혀 있는 화려한 삶이 재스민의 정신을 이미 좀먹고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재스민의 허영심은 진저의 삶마저 흔들어놓는다.

우디 앨런은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주어진 것들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진저와 방법론적인 문제가 있긴 했지만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재스민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딱히 가리려하진 않았다. 제목부터 ‘우울한 재스민’이니까. 1966년부터 거의 해마다 빠짐없이 장편 한 편씩을 발표해온 우디 앨런의 연출과 편집은 물 흐르듯 유려해서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현재와 뉴욕에서의 과거를 끊임없이 오가는 재스민의 드라마에 관객을 풍덩 빠트린다.
여기에 지적인 외모의 연기파 케이트 블랜쳇(44)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신들린 듯한 연기로 재스민이 처한 다난한 상황과 복잡한 감정 속으로 빨려들게 만든다. 고상한 상류층 부인네의 여유와 자존심, 남자를 잡으려는 내숭, 불안한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수다와 혼잣말 연기까지 엄청난 진폭을 요하는 재스민의 내외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울음으로 마스카라가 번진 흉측한 모습, 막 샤워한 후 화장기하나 없는 망연자실한 표정까지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명배우의 연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감이라는 평단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뉴요커의 페이소스’라 불릴만큼 좀처럼 뉴욕을 떠나지 않았던 우디 앨런은 지난 8년여간 유럽으로 무대를 옮겨 주로 활동했다. ‘매치포인트’(2005), ‘스쿠프’(2006), ‘카산드라 드림’(2007), ‘환상의 그대’(2011)를 영국에서 찍었고, 아예 유럽도시 이름을 타이틀에 내세운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한국개봉 제목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10)와 ‘미드나잇 인 파리’(2011), ‘로마 위드 러브’(2012)로 주요 도시 순례를 했다. 그가 덴마크 코펜하겐을 돌아보는 것이 목격되며 차기작은 이곳에서 찍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지만 마침내 뉴욕으로 귀환했다. 그의 오랜 팬들은 우디 앨런다운 위트와 신랄한 대사, 블랙코미디적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번 작품을 ‘우디 앨런 클래식’이라고 부르며 반기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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