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암행어사 아니었다?…초상화로 만나는 한국사

【서울=뉴시스】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서울=뉴시스】박현주 기자 = '암행어사'하면 단연 박문수인데, 그는 암행어사를 한적이 없고, 황희 정승이 마냥 청렴하지만은 않았으며, 천원권 지폐 있는 퇴계 이황의 초상은 '상상화'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뒤집는 책이 출간됐다. '초상화'를 근거로 'CSI'(뉴욕 과학수사대)같은 추적을 한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다.
책속으로 들어가 일단 '박문수가 암행어사를 한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어봤다.
"박문수는 설화와는 달리 실제 역사속에서는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박문수는 1727년 9월 25일부터 이듬해 4월 14일까지 약 6개월간 '영남별건어사'로 활동했다. 별건어사는 흉년에 굶주린 사람들을 보살피거나 양역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감독과 순찰의 의무를 띠고 파견된 관리로 암행어사와는 많이 다르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국왕의 명으로 몰래 지방관을 감찰하고 그들의 비리를 척결하던 관원이었다. 그의 암호명은 '암행어사 출두요'로 이 한마디면 지방수령들이 혼비백산 도망가는 장면은 21세기 현대인의 눈에도 선하게 각인돼있다.
그런데 박문수는 어떻게 암행어사 아이콘이 됐을까.
33세때 과거에 급제해 사관으로 벼슬 생활을 시작한 박문수는 뜻밖에도 당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호조판서로 재임하면서 군포의 폐단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균역법'제정을 주도했다. 사람 단위로 부과하던 군포를 가구 단위로 전환해 농민 부담을 경감시키는 대신 부족한 재원을 어전세, 염세, 선게등을 신설해 채우는 획기적 제도다.
또 별건어사로 재임하면서 비록 기간은 짧았지만 환곡을 풀어 흉년으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구했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했다. 지방의 현감과 판관, 부사등의 자질과 업무수행등을 평가하고 술을 좋아하고 지식이 밝지 못하며 간사한 지방관들을 파직할 것, 명망있는 인물을 지방관으로 임명할 것등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조치는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고 함경도에서는 그를 위한 송덕비까지 세워졌다. 그의 생애을 통해 백성을 구휼하는 행적이 여러차례 확인되지만 당대에 암행어사의 대표격으로 추앙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휴대에 들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바라는 염원이 그를 영원한 암행어사로 각인시키기 시작했고, 일제시대 '박문수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러한 이미지는 더욱 고착화됐다."

【서울=뉴시스】작자미상, '박문수 초상' (보물 제1189-2호) 조선시대, 40.2×28.2㎝, 개인소장.<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박문수는 어사를 한적이 없다 24 p>
박문수가 암행어사가 아니었던 만큼 황희도 청백리는 아니었다. 황 희는 56년간의 관직생활 중 재상으로 24년을 있었고, 그중에 영의정만 18년을 했다.
"명재상이기는 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고위직에 있으면서 각종 비리에 연루돼 청렴하기는커녕 부패했다." 놀라운 일도 있다. 공직자 감찰기구인 사헌부의 수장으로 재직 때엔 승려에게서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 대사헌'으로 불렸고, 심지어 조선 개국공신이면서 2차 왕자의 난 때 참형을 당한 박포의 부인과 간통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청백리 표상이 됐을까. "어떤 경로를 거쳐 형성됐는지 알 수 없지만 민간에서 지속적으로 전해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청빈한 공직자가 매우 드물었다. 민초들은 조선시대 공직자의 대표주자였던 황희 정승에 청백리 이미지를 심어 부정한 공직자들이 본받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황희 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경북 상주 옥동서원 영정을 조선 후기에 모사 한 것으로 매우 강한 인상을 풍기는 이 초상화의 원본은 황희가 62세(1424년)때 그려졌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가 몰랐던 역사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는 것이 장점이다. 공개된 초상화, 그리고 공개되지 않았던 초상화를 총망라하며 위인들의 실제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조선시대 최고 박색 박씨부인 남편은 의외로 '꽃미남'이었고, 철종은 '사시'였다. 또한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실무능력을 보여준 장만의 경우 안대를 찬 ‘애꾸’ 모습이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뽀샵'(보정)이 없다. 천연두 자국이나 사마귀도 그대로 그렸다.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時他人,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다면 곧 다른 사람이다)’이라는 조상들의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이황뿐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 김유신, 장보고 등 많은 유명 위인들의 초상화가 전해지지 않는다. 사료가 많을 것이라 생각되는 왕조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 초상화의 경우 1954년 한국전쟁 당시, 부산국악원으로 옮겨졌다 화재로 인해 대부분 불타버리고 말았다.

【서울=뉴시스】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 18세기, 종이에 채색, 38.5×20.5㎝, 녹우당(국보가 된 걸작 초상화 376p)
초상화 걸작은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이다.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 한 강렬한 눈매, 꽉 다문 입술,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 꿈틀거리는 수염은 하이퍼리얼리즘을 뛰어넘는다. 국보(제 240호)가 된 이 초상은 우리 회화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걸작으로 꼽힌다.
초상화의 현실도 알려준다. 현재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총 75점, 특별히 높은 가치가 인정돼 국보 목록에 올라운 초상화가 있지만 '윤두서 자화상'을 포함해 5점에 불과하다. 윤두서와 함께 국보 제 239호에 오른 송시열 초상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5점의 송시열 초상화중 제일 수작으로 꼽힌다. 책의 표지를 장식한 건 작자미상의 '이채 초상'이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사 기자로 주로 정책기사를 써왔던 저자가 초상화에 관심을 가진건 2014년 정치권이 최악의 소모전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조선 선조대 파당을 초월해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퇴계 이황을 재조명하는 기획 기사를 준비하면서다.
"퇴계 초상화를 찾았는데 1000원권 지폐의 퇴계영정이 한국화가 현초 이유태의 상상화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저자 배한철은 "익숙한 이 영정외 실제 그의 초상화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을 갖고 도서관을 뒤졌지만 불행히도 퇴계의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면서 "실제 퇴계의 제자 중 한명이 철상을 제조해 매년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과연 퇴계 초상화의 행방을 찾을수 있을까"라며 여전히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
사진 한 장은 열 마디 말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진이 없던 과거에는 초상화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초상화를 통해 보는 역사적 인물의 뒷 이야기가 흥미롭고 생생하게 펼쳐지는 이 책은 '초상화로 만나는 한국사'다. 텍스트 위주의 우리 역사를 보는 시각을 넓혀 준다.
저저는 "일반인들의 초상화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높이고 더 나아가 새롭게 밝혀낸 역사적 인물의 모습을 표준영정 제작등에 반영할 수 있도록하자는게 책을 펴낸 이유"라고 밝혔다. 388쪽, 생각정거장,1만8000원
h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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