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버린' 친미 파나마 독재자 노리에가…30여년 수감생활 끝에 사망

【 파나마시티=AP/뉴시스】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가 29일(현지시간) 파나마 시티 병원에서 83세로 사망했다. 사진은 1989년 11월 8일 파나마 시티에서 언론 취재에 응하고 있는 노리에가 당시 파나마 최고 지도자. 2017.05.30
노리에가는 공산주의의 영향에 맞서 싸워 파나마를 미국의 핵심 동맹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과 강력한 결속 관계를 자랑하던 그 역시 마약 밀매와 돈세탁 혐의를 피하지 못해 권력에서 밀려나 미국에서 수감 생활을 해야만 했다.
노리에가는 1934년 2월11일 극빈층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 입양되면서 페루 군사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친미 성향을 보이면서 그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관심을 받았으며 쿠바 혁명 과정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인물로 부상했다. 실제로 그는 이후 수십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자 역할을 했다.
1968년 아눌포 아리아스 대통령을 축출시킨 오마르 토리호스 장군의 쿠데타를 지지한 노리에가는 파나마군 정보 책임자로 임명됐고 1981년 토리호스가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 파나마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최고 실세로 자리잡았다.
당시 미국은 중미 정세 파악을 파나마에 의존했다. 노리에가는 니카라과의 콘트라 세력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FMLN)에는 정면으로 맞섰다.
노리에가는 1983년 루벤 다리오 파레데스 파나마군 최고사령관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그 자리를 계승했지만 곧바로 파라데스를 체포한 후 파나마의 사실상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1984년 파나마 대선에서 자신이 지명한 후보의 압도적 패배가 확실시되자 개표를 중단시키는 등 전횡도 마다하지 않았다. 1년 뒤인 1984년에는 노리에가의 최대 정적이던 우고 스판다포라가 파나마로 귀국하던 중 실종돼 목잘린 시체로 발견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노리에가는 1980년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에 반대하는 니카라과 반정부 세력에 무기를 지원하는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으며 미국의 핵심 동맹세력이 됐지만, 결국 미국의 버림받아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를 침공하자 주파나마 바티칸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1월 3일 항복하고 체포돼 미국에 압송됐다.
노리에가는 1992년 9월 미국에서 40년형(이후 30년형으로 감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2007년 감형으로 풀려났지만 , 2010년 프랑스 파리로 추방돼 다시 돈세탁 혐의로 재판을 받아 7년형을 선고 받았다. 2011년 9월 가석방 결정이 내려지면서 같은 해 12월 파나마로 돌아왔지만 다시 20년형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건강악화로 올해 1월 가택 연금 상태로 지냈다.
노리에가는 미국과의 관계를 이용해 파나마에서 자신의 권한을 강화한 대표적인 기회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1998년 조지 H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노리에가를 잡겠다며 주권국가인 파나마 침공을 단행한 것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미 상원은 미국과 노리에가의 관계를 미 외교 정책의 최대 실패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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