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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상일 감독과 아름다운 괴물

등록 2025.11.18 0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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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9일 국내 개봉 '국보' 연출 맡아

일본서 1200만명 매출액 170억엔 넘겨

23년만에 나온 실사영화 1000만 기록

가부키 소재에 러닝타임 175분 달해

"관객이 아름다운 걸 원하고 있었다"

재능과 혈통으로 얽힌 두 배우 이야기

"배우의 아름다움은 그림자를 동반해"

"일본 영화계 '국보'로 가능성 본 듯"

[인터뷰]이상일 감독과 아름다운 괴물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관객수 1200만명. 매출액 170억엔(약 1600억원). 영화 '국보'는 일본 실사영화 흥행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굳이 영화가 아닌 실사영화라고 표현한 이유는 애니메이션 영화 시장이 실사영화 시장 규모보다 큰 일본 영화계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일본 실사 영화 역대 1위 작품은 2003년에 나온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2-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다. 관객수는 1260만명이고 매출액은 173억엔이다. 일본 언론은 '국보'가 이 기록을 넘는 건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다. 일본에서 1000만명 이상 본 실사영화가 나온 건 2003년 이후 23년만이었다.

'국보'를 만든 건 이상일(51) 감독이다. 자이니치(在日·재일한국인) 3세인 이 감독은 '훌라 걸스'(2007) '악인'(2011) '분노'(2016) '유랑의 달'(2022) 등으로 일찍이 빼어난 연출력을 인정 받았다. 다만 굳이 나누자면 작가주의에 가까운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대체로 흥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그가 이처럼 폭발적인 흥행을 만들어낸 건 물론이고 일본에서 나고 자라긴 했으나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 사람이 일본 전통 무대 예술인 가부키와 가부키 배우를 소재로 삼은 영화로 일본 영화계를 뒤집어 놨다는 점에서 '국보'의 흥행은 일본 관객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 관객에게까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최근 이 감독을 만났다. 그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 흥행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이젠 알 것 같냐"고 물었다. 이 감독은 "그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웬만한 답변은 최대한 한국어로 한 그는 '국보' 흥행 이유로 일단 두 가지를 꼽았다. "일본 사람은 가부키가 뭔지 다 압니다. 하지만 잘 알진 못하죠. 어떤 내용인지, 어떤 무대인지 몰랐을 거예요. 그저 올드한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하는 본능 때문일 겁니다. 특히 요즘처럼 불안과 긴장 속에 살 땐 더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걸 원하죠. 이 영화엔 가부키 자체의 아름다움, 그리고 가부키를 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볼 때 마음이 정화되는 그 느낌, 어쩌면 사람들은 그걸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터뷰]이상일 감독과 아름다운 괴물


'국보'는 온나카타(가부키에서 여자 역할을 하는 남자 배우)인 타치바나 키쿠오(요시자와 료)와 오가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야쿠자 집안 아들인 키쿠오는 부모를 잃고 가부키 집안에서 자라게 되고, 이 가문 후계자인 슌스케와 함께 가부키 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영화는 일본 최고 가부키 배우가 되기 위해 매진하는 두 사람의 삶과 평생을 함께 보낸 이들의 생사고락을 담는다. 요시다 슈이치 작가가 2019년 내놓은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이 감독은 요시다 작가 작품을 몇 차례 영화화한 적이 있고, 두 사람은 온나카타에 관한 관심을 공유하다가 소설이 먼저 나오고 영화가 뒤를 잇게 됐다.

"가부키의 다양한 측면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일단 스타일이 독특하죠. 분장·의상·무대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주제는 매우 보편적입니다. 온나카타라는 존재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예술이 혈통으로 계승된다는 점입니다. 이것 역시 특별했습니다."

이 감독이 말하는 혈통, 피는 '국보'를 관통한다.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으나 피를 가지지 못한 키쿠오와 키쿠오만큼의 재능은 가지지 못했으나 피를 가진 슌스케는 성인이 되고 차세대 가부키 배우로 본격적인 주목 받으면서 삶이 엇갈린다. 슌스케의 아버지이자 두 사람의 스승인 하나이 한지로는 키쿠오에게 말한다. "네 재능을 믿어라." 반면 슌스케에겐 이렇게 말한다. "네 피가 너를 지켜줄 게다." 키쿠오는 슌스케의 피를 원하고, 슌스케는 키쿠오의 재능을 갈망한다. 키쿠오는 재능 탓에 망가지고, 슌스케는 피 때문에 무너진다. 반대로 키쿠오는 재능 덕에 부활하고, 슌스케는 피로 재기한다. 이 감독은 "무대 위에서 빛을 받기 위해 그 빛보다 훨씬 많은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가 배우"라며 "그래서 존경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고 말했다.
[인터뷰]이상일 감독과 아름다운 괴물


"제가 아까 배우들이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배우들은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삶은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로 가부키 배우는 무대를 위해 자기 삶을 온전히 바칩니다. 그 무언가를 표현하겠다는 그 욕구를 먹고 살지요. 그래서 매우 에고이스틱한 존재이고, 누군가에게 그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감독의 이런 시각은 당대 최고 온나카타인 오노가와 만기쿠(타나카 민)의 공연을 본 키쿠오와 슌스케의 대사에 드러난다. "괴물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괴물이야."

러닝타임이 175분에 달하는 '국보'에선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 <도죠지의 두 사람> <소네자키 동반자살> <백로 아가씨> 등 가부키 공연을 볼 수 있다. 오시자와 료와 요코하마 류세이는 이 장면들을 위해 1년 6개월 간 가부키를 연습했고, 실제 가부키 배우 4대손 나카무라 간지로가 이들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촬영감독 소피안 엘 파니가 카메라를 잡았고, '킬 빌' 시리즈의 타네다 요헤이가 미술을 맡았다. 이렇게 완성된 가부키 장면은 '국보'의 벡미다. 특히 두 차례 나오는 <소네자키 동반자살> 시퀀스와 마지막 '백로 아가씨' 시퀀스는 관객을 압도한다. 이 감독은 "가부키란 예술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 시점의 촬영을 했습니다. 우선 관객 입장의 시점이 필요했습니다. 말 그대로 가부키를 보는 것이죠. 또 한 가지는 배우의 시점이 필요했습니다. 이 영화는 가부키 영화이면서 가부키 배우의 영화이기 때문이죠. 배우가 무대 위에 오르면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보여줘야 했습니다. 세 번째 시점은 바로 배우의 내면 시점이었습니다. 배우의 고통과 그가 받고 있는 압박감 혹은 연기를 할 때 느끼는 기쁨을 보여주기 위해 클로즈업을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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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과 '국보'에 관해 나눈 이야기는 결국 다시 흥행에 관한 얘기로 돌아왔다. 애니메이션 영화와 TV 드라마의 극장판이 주류인 일본 영화계에서 두 카테고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데다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 가까이 되는 작품이 거둔 성공이 주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 감독은 '국보'의 성공은 곧 가능성이라고 했다. "가부키라는 것, 그리고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 그런데 난리가 났다는 것(웃음), 이건 관객이 더 다양한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이 감독에게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 이런 흥행을 한 번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꿈을 꾸긴 했습니다. 하지만 상상해본 적은 없어요. 꿈과 상상은 다르니까요.(웃음)"

온갖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고 인간 국보라는 칭호를 듣게 된 키쿠오는 배우로서 도달하고 싶은 경지에 관해 이렇게 얘기한다. "어떤 풍경이 보고 싶습니다." 인터뷰어는 그게 무슨 풍경이냐고 묻지만 키쿠오는 답하지 않는다. 이 감독에게도 영화예술가로서 보고 싶은 어떤 풍경 같은 게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자님이 상상해보고 마음대로 써달라"고 말하며 웃었다. "있긴 있지만 그 모습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1000만명이 봤다거나 훌륭한 상을 받았다거나, 이런 건 아니겠지요. 그건 너무 직접적이니까요. 아무래도 그 풍경이라는 건 관념적인 어떤 것일 겁니다. 그래서 기자님 마음대로 써달라는 겁니다."

일본영화제작자연맹은 '국보'를 내년 3월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 부문에 일본 대표로 출품했다. 만약 '국보'와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모두 최종 후보가 되면 한국 감독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경쟁하는 진풍경이 펼쳐질 수도 있다. 이 감독에게 수상 욕심이 나냐고 물었더니 이번에도 웃으면서 "마음대로 써달라"고 했다. "박 감독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저 등을 보고 따라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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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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