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일 역사작가 "하영 증조부, 친일인명사전 미등재 면죄부 얻은 것 아냐"
등록 2026.08.14 16:49:34
![[서울=뉴시스] 박광일 역사 작가가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논란을 두고 해당 인물의 생애와 친일 행적,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사진=CBS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 유튜브 캡처)](https://img1.newsis.com/2026/08/14/NISI20260814_0002213183_web.jpg?rnd=20260814161548)
[서울=뉴시스] 박광일 역사 작가가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논란을 두고 해당 인물의 생애와 친일 행적,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사진=CBS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 유튜브 캡처)
[서울=뉴시스]박세은 인턴 기자 = 박광일 역사 작가가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논란을 두고 해당 인물의 생애와 친일 행적,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14일 CBS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에 출연한 박 작가는 안상호에 대해 "1872년 서울에서 태어나 관립 일어학교 1회를 졸업하고 관비 유학으로 일본 자혜병원 의학교를 나와 1902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의사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라 소개했다.
이어 "1906년 러일전쟁 승리 기념 관병식 때 일본을 방문했다가 병이 난 의친왕을 치료한 인연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촉탁의가 됐고 1907년 종로에 진료소를 열며 국내 최초의 개업 서양 의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안상호의 행적은 확연히 달라졌다며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주요 친일파들처럼 큰딸을 일본인 전용 학교인 앵정소학교에 보냈다"며 "특히 무단통치 시기였던 1916년 총독부 허가를 받은 유일한 한국인 단체이자 명확한 친일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고 지적했다.
또 191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를 언급하며 "기사에서 본인 스스로 '나는 완전 내지화(일본화)됐다'고 하며 매운 음식도 잘 못 먹고 집에서는 일본어만 쓰며 조선 옷은 입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진도 일본 옷을 입고 찍었을 정도로 보통의 한국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정체성을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 제기된 '고종 독살설 연루 의혹'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박 작가는 "당시 일제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을 통해 내선융화를 적극 홍보하던 때라 혼주인 고종을 독살해서 득을 볼 사람이 없었다"며 "고종 승하 이후에도 의친왕이 안상호를 불러 치료를 받았던 점 등을 볼 때 독살설 연루 가능성은 역사적으로 희박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작가는 안상호가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빠져 있는 것은 "면죄부를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당시 친일인명사전은 사회적 반발을 고려해 명백한 친일 행위가 있거나 조직의 간부급이었던 '중요 친일파' 위주로 먼저 등재했다"며 "안상호는 평의원 개념이었고 일상적인 아첨 수준의 행적이 주를 이뤄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 향후 연구를 통해 충분히 추가 등재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독립운동가 후손들과의 비교를 통해 역사적 책임에 대해 강조했다.
박 작가는 "당시 독립운동을 한 번 하면 학생들이 퇴학을 당해 제대로 된 교육과 직업을 얻지 못했고 그 후손들 역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며 "친일 행위로 부를 축적한 가문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처지를 병렬 선상에 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박 작가는 "친일파의 죄에 대해 당대에 벌을 주고 재산을 환수하는 문제와 후손이나 공동체가 지는 책임의 문제는 별개"라며 "이번 논란이 내 주변과 공동체 안에서 역사적 책임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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