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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야기⑥]사카린 밀수사건 그리고 '자연농원'

등록 2013.06.23 06:00:00수정 2016.12.28 07:3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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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이병철 회장이 한국경제인협회 일에 전념하고 국가 경제를 살릴 방법을 고민했지만, 그렇다고 부정 축재자의 오명을 완전히 벗은 건 아니었다.

 비료 회사, 은행 등의 주식은 모두 정부에 환수됐다. 1966년에는 밀수 혐의까지 받았다. 정부에서 맡겨 추진하던 한국비료 공장 건설 중에 ‘사카린(합성감미료의 일종. 당도가 설탕의 500배 정도이지만 방광암을 일으킬 수 있어 현재는 식용으로 사용되지 않는 물질)’을 대량 밀수했다는 것이었다. 밀수라는 오명은 이병철 회장 인생 최악의 수치이자 고난이었다.

 “사카린이 시중에 많이 나돌면 저희 제일제당이 제일 타격을 입을 텐데, 우리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라고 항변해도 소용이 없었다. 언론은 매일같이 기사로 매를 때렸다.

 정치권도 삼성을 두고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삼성은 많은 것을 잃었다. 이병철 회장도 경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주홍글씨와도 같은 낙인과 쌓아 올리면 다시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하는 사업에서 떠나고 싶었다.

 이병철 회장은 첫째 아들에게 그의 자리를 맡기고 경영에서 물러났다. 경영 전선을 떠나 있었지만 이병철 회장의 머릿속에는 실의와 재기에 대한 갈등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해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다.

 “우리나라 산은 유난히도 헐벗었군.”

 “네?”

 수행 비서는 어떤 답을 해야 하나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답을 원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혼자 생각 중이었다. 헐벗은 산하가 우리의 아픈 역사이고, 산업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나라는 국토의 3분의 2가 산지이면서도 산림 자원이 빈약했다. 조선시대까지는 산림 왕국이었다고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산림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일제에 의한 벌목과 광산 개발, 해방 이후 땔감 등을 위해 이루어진 무차별적인 벌채, 화염에 휩싸였던 한국전쟁으로 인해 헐벗은 산이 되었다. 심지어 빨치산 소탕을 위해 멀쩡한 나무를 벌채하기도 했다. 반만 년 동안 보존해온 녹음이 이 짧은 기간 동안 1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해버렸다.

 이병철 회장은 논과 밭에도 시선이 머물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공업 분야는 고도 성장을 하여 경제적인 자립 기반을 형성했지만, 공업 분야에 비해 농업 분야가 상대적으로 낙후되면서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농촌의 문제는 경작지가 좁고, 자연환경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었다. 가뭄이 오거나 태풍이 오는 해에는 농민들은 꼼짝없이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이것이 곧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사실은 선진국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농민들이 몰락하고, 언젠가 식량 위기가 올지도 몰라. 농지도 넓히고 종자도 개량해서 우리나라 스스로 식량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문득 유럽에 갔을 때 들른 스위스가 떠올랐다.

 ‘스위스는 우리나라 땅의 절반밖에 안 되는 크기에 더군다나 산 속에 있는 나라다. 하지만 불리한 입지 조건을 극복하고 산지를 농지와 목축 용지로 활용했어. 우리는 분명 더 유리한 조건이야.’

 이병철 회장은 즉시 여러 전문가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시원치 않았다.

 “우리나라는 토질이 기름지지 않습니다. 비도 적게 오고요. 수목이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이 아닙니다.”

 “고려 시대만 해도 산림이 울창했다는 기록이 있던데, 그건 어찌 된 겁니까? 또 옛 건물들을 살펴보면 아름드리나무(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건 어디에서 구한 걸까요?” 하고 이병철 회장이 따지면 “글쎄요. 그건 옛날이야기니까요”라고 말하며 웃어넘겼다.

 이병철 회장은 답답했다. 이때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이 나타났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권위 있는 산림학자인 박사 현신규였다. 현 박사는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기업하시는 분이 나무에 관해서는 뭐하려고 공부를 하십니까?”

 “우리나라도 스위스처럼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선진국이 되는 데에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큰 보람이 될 것 같습니다.”

 현 박사는 이병철 회장의 눈빛에 담긴 진심과 말 속에 담긴 혜안에 속으로 놀랐다.

 “저와 함께 광릉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그곳에 답이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현신규의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현신규 박사의 말대로 함께 광릉으로 향했다.

 광릉에 도착한 이병철은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거대한 나무들이 내뿜는 싱그러움, 초록의 생명력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정말로 답이 이곳에 있었군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감동은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굵은 나무가 어떻게….”  

 “우리나라 토질이 좋지 않다고요? 절대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것은 반사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흔한 흙이지요. 나무가 잘 자랍니다. 자연 조건만 따지자면 산림이 울창하다는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훨씬 좋습니다.”

 ‘그래, 후세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내 생애 마지막 사업으로 생각하고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이병철 회장은 틈나는 대로 세계 각국의 조림에 관한 연구 자료를 면밀히 검토했다. 해외 산림전문가들도 초빙해서 사업의 타당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구했다. 어느덧 가슴속 깊은 상처들이 하나둘 나아가는 것 같았다.

 ‘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새로운 도전뿐이야.’

 “우리나라는 땅의 60퍼센트가 산지입니다. 그중 4분의 1은 개발이 가능합니다.”

 전문가들이 최종 의견을 전했다. 이병철 회장도 마음을 굳혔다.

 ‘나라 전체로 보면 158억 제곱미터를 개발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을 농지나 목축 용지, 과수를 심는 방법으로 개발하면 식량 자급자족, 소득 증대, 국토 확장이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1968년 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을 주축으로 하는 용인 자연농원의 조성사업에 들어갔다.

 “토질, 강우량, 온도, 습도가 국내 평균치여야 합니다. 또 시범 사업이니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지시대로 몇 군데의 농원 부지가 후보에 올랐고 최종적으로 경기도 용인을 선정했다. 얼마동안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곧 어려움에 부닥쳤다. 용인 땅의 주인들이 대부분 영세해서 무려 2000여 명의 동의를 얻어야 했을 뿐만이 아니라 땅 중에 묘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큰 문제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 묻히신 곳에 돼지를 키우겠다는데 내가 그런 일에 도장을 찍어줄 것 같아요?”

 “개발이란 게 다 산을 망치는 거지, 다르긴 뭐가 달라?”

 “한쪽에는 놀이동산도 만든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도 시원치않은 판에 돈을 쓰라고 부추기는 건 말도 안 되지!”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한 사업을 하는 회사라고 떠들어대더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사람들의 불만과 불신은 하늘을 찔렀다. 레저 산업에 투자할 돈이 있으면 중공업에 더 투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과 직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국가 전체가 경제 성장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때이지만, 국민들의 제대로 된 휴식처를 한 군데 정도는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본래 취지는 농업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병철 회장은 자연학습장과 레저 활동을 겸한 낙원, 세대를 넘어 모델이 될만한 시설을 만들어 보여주고 싶었다.

 그와 직원들은 사람들에게 농원 사업의 목적과 의의를 설명하고 꾸준히 설득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결국 1971년 착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5년의 세월에 걸쳐 100억 원의 자금과 이병철 회장의 원대한 구상이 만났다. 1485만㎡의 불모지가 낙원으로 변했다.

 그동안의 산림 개발이 실패한 이유가 체계적이고 종합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 이병철은 키울 나무 종류를 엄선하는 것부터 개발을 차례로 진행했다.

 토양과 기후에 맞는 종, 호두나무나 살구나무처럼 식량 자원이나 가공식품의 원료가 될 수 있는 종, 세계적으로 희귀한 종도 1200여 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롱우드식물원(미국 펜실베니아에 있는 식물원)을 모델로 삼았다.

 “경사도가 15도 미만인 평평한 곳에는 묘목을 길러서 일반인들에게 공개합시다. 자연학습장이 되도록 말이지요. 30도 미만인 낮은 구릉에는 수익성과 효율성이 높은 호두, 살구, 밤을 심읍시다. 수확하기가 수월해질 것입니다. 급경사 지대나 높은 지대는 장기간 길러야 하는 목재 조성용 나무를 심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를 심고….”

 그는 한 가지를 결정하면 그 다음에 필요한 일들을 바로 연결 지어 생각했다.

 “가만, 그럼 땅이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에는 거름이 필요할 텐데…. 거기에 양돈 단지(돼지를 기르는 곳)를 만들면 되겠군요.”

 양돈은 퇴비를 공급하는 동시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이었다. 곧 개량종 씨돼지 600마리를 수입하기 위해 비행기 3대를 동원했다.

【서울=뉴시스】1976년 용인자연농원 개장식에서 참석자들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3번째가 이병철 회장이다. (사진=인생은 흐르는물처럼 '담담여수' 서적)  photo@newsis.com

 “비싼 소를 키워야지, 왜 하필 돼지지?”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돼지가 소와 같은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이면서도 소보다 사육과 번식이 쉽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 수출로 외화 획득도 가능했다. 자연농원은 한 단지에서 돼지 5만 마리를 기르는 국내 최초의 기업적 양돈을 시도했다. 여섯 종의 돼지 종자를 토대로 품종을 개량해서 기존보다 번식률을 20%나 높였고, 사육 기간을 5개월이나 단축했다. 덕분에 소비되는 사료를 3분의 1로 절감했다. 돼지는 훌륭한 수출 상품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병철은 무척 기뻤다.

 '전국에서 기르는 재래종 돼지를 우리 자연농원에서 개발한 종으로 바꾸면 새끼 돼지를 길러 판매만 해도 연간 100억 원의 수익을 얻을 수 있어.’

 “유실수를 개량하고 묘목, 종돈, 치어를 공급하고 영농 기술을 보급해 농가 소득을 늘리는 데에 조금이라도 길잡이가 되고 있으니 한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또 우리나라 산림 개발의 가능성과 미래상을 확인해서 뿌듯합니다.”

 만족스러운 농장 프로젝트의 결과였다. 그는 여기에 다시 한 번 아이디어를 보탰다.

 “이런 시설을 모든 사람들이 널리 이용할 때까지 농원 사업은 완결된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상상해주십시오. 단순히 자연을 즐기고 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거대한 야외 교실이고, 국가 발전을 위한 실험의 장입니다.”

 1976년 자연농원은 드디어 역사적인 개장을 했다. 입장료는 성인 600원, 어린이 300원! 지금 가치로 따져보면 3만 원 정도 하는 가격이었다.

 레저 시설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 수많은 가족들이 자연을 아름답게 조성해놓은 자연농원 속에서 함께 휴식을 즐기고 미래를 설계했다.

 한편 경영진은 계속해서 세계 곳곳의 유명 테마파크를 견학하고 공부했다. 그들은 미국의 ‘디즈니랜드’, 일본의 ‘요미우리랜드’처럼 우리 어린이들이 자연을 배우면서 꿈과 낭만을 키울 수 있는 더 나은 자연농원을 구상했다.

 세계 각국에서 진귀한 동식물도 속속 들여왔다. 국내 최초로 사자 사파리도 개장했다. 멧돼지 축구, 공작 쇼, 물고기 안 먹는 오리 등은 당시 자연농원 내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볼거리였다.

 근처에 호암미술관과 각종 첨단 놀이기구들도 들어섰다. 이로써 용인 자연농원은 그야말로 다목적 기능을 갖춘 국민들의 휴식처가 됐다.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 노력 덕분에 자연농원은 국내 농업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레저 시설로서도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이병철 회장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인 1996년에 자연농원은 세계 10대 테마파크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자연농원은 이를 계기로 이름을 ‘에버랜드’로 바꿨다. 미래 세대를 위한 영원한 낙원을 꿈꾼 이병철의 뜻을 기리고 국제화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서였다. 이후 소득이 향상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레저 시설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놀이기구, 테마파크의 기능을 좀 더 확대했다. 지금의 신나는 놀이동산, 에버랜드는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완성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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