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이야기⑭·끝]20세기를 산 21세기형 기업가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도 강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아름다운 작품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라. 예술 작품과 작가에 대한 예의다”라고 가르쳤다.
이병철 회장이 특히 사랑한 것은 도자기였다. 한번은 이병철 회장이 도자기를 수집한다는 얘기를 듣고 골동품 판매상이 찾아왔다.
“이것은 고려 시대에 만든 주전자입니다.”
그가 꺼낸 것은 표주박 모양을 한 주전자로 고려 시대 청자였다. 한눈에 보아도 천하제일의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보석의 비취색보다 더 고왔고 태고의 신비로움이 감돌았다.
‘보통 물건이 아니다.’
골동품 판매상은 이런 이병철 회장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얼마지요?” “회장님이 사시면 3500만 원까지 해드리겠습니다.”
값이 너무 높았다. 3500만 원이면 지금 돈으로 10억원은 족히 됐다.
“너무 비싸군요.” “원래는 일본인 주인이 더 비싼 값에 내놓았던 것입니다.” “주인이 일본 사람입니까?”
이병철 회장은 자리를 뜨려다 일본인이라는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주인이 청자를 어찌 구했을지는 뻔했다. 분명히 밀반출(물건 따위를 몰래 내감)된 작품이었다.
‘이런 도둑 심보를 봤나! 남의 나라 예술 작품을 헐값으로 사가서 그걸로 돈을 벌 생각을 하다니.’
이병철 회장은 골동품 판매상이나 그 주인이 하는 짓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제가 사겠습니다.” “역시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당시 골동품 거래 가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 작품이 탐나서도 아니었다. 이병철 회장이 기꺼이 바가지를 써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작품을 다시 일본으로 보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만한 돈을 가진 사람들이 몇 없었기에 자신이 사지 않으면 분명 사겠다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이병철 회장이 전통 문화재를 수집한 것은 해방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예술 작품들이 마구잡이로 일본으로 팔려나가는 것이 안타까워서였다.
"긍지 없는 민족은 얼굴이 없는 것과 같다. 긍지를 버린 민족은 자기를 버린 것과 같다. 문화재는 바로 그 민족, 그 국민의 얼굴이며 마음이다.”
그가 국외로 유출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되사오느라 작은 빌딩 한 채에 해당하는 거액을 지불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 성공 가도를 달리자 이런 이병철의 우리 문화재 사랑을 잘 알고 있던 전택보(천우사 창업주. 조선일보 대표이사, 상공부장관 역임) 같은 사람들이 돈은 많이 모았으니 이제 문화 사업을 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라며 거절했다.
이병철 회장의 생각이 바뀐 것은 1965년 즈음. 당시 그는 55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제일의 부자라는 평을 얻고 있었고 그 부를 사회에 돌려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 애쓰는 연구자들과 다양한 문화 사업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병철 회장은 문화재단 설립을 결심하고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너무 많은 재산을 독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족이 생활하고 남는 재산은 문화재단에 출연해 사회 공익에 기여하도록 하자꾸나. 우리 가족이 앞장서서 사회 번영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55번째 생일을 맞아 ‘삼성문화재단(현 삼성미술문화재단)’을 만들었다. 그는 설립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제가 이룩한 기업체 중 어디에도 제 꿈과 피가 어리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피땀을 흘리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룬 결실입니다. 하지만 개인 생활을 영위하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는 재산을 제가 개인적으로 소유하여 사장하거나 방치하는 것보다 사회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영원히 저의 손을 떠나 돌아오지 않을 이 재산이 새로운 공익 재단이 사업 활동을 하는 데에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이병철 회장은 재단 기금으로 본인 소유의 주식과 임야 36만 3000㎡, 주택 등 10억 원 상당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병철은 6년 후인 1971년에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저의 전 재산의 3분의 1을 삼성문화재단에 추가 출연하겠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재산은 당시 180억 원으로 평가되었는데 60억 원은 삼성문화재단, 60억 원은 삼성그룹의 유공사원들에게 주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60억 원 중에서 10억 원은 사원 공제조합기금으로 기증하고 50억 원은 나중에 그 용도를 생각하기로 했다.
삼성문화재단은 용인 에버랜드 옆에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미술관’을 만들었다. 해외로 밀반출되는 나라의 보물을 지키고 전통문화 예술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병철 회장은 “세계를 돌아보면 전통 있는 민족, 격조 높은 국민은 예외 없이 좋은 미술관을 가지고 있다. 선을 사랑하고 미를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의 문화 수준은 그만큼 높다”라고 말해왔고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문화재들을 재단에 기증했다. 현재 호암미술관에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90여 점이나 된다. 여기에는 ‘청자진사연화문표형 주자’도 포함돼 있다.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에 자금이나 시설을 지원하는 활동을 일컬어 ‘메세나’라고 한다. 요즘은 기업들이 이런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이 문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현재도 삼성미술문화재단은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를 바랐던 이병철 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의 문화 사업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미술품의 아름다움을 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취지로 영국 ‘빅토리아&알버트 미술관’과 프랑스 ‘기메 박물관’ 등에 한국실을 짓도록 지원했다.
또 한국 미술 신진 작가를 지원하거나 한국 작가의 해외 진출을 독려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국악 동요제를 열어 창작국악동요 공모와 보급을 위해 국립국악원을 후원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공연을 무료로 제공하는 문화나눔사업도 다양하게 벌이고 있다. 뛰어난 재능이 있지만 악기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 음악도에게 세계적인 명기를 대여해 세계적인 연주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도 한다.
이병철 회장의 문화재 수집은 한국 문화를 부흥시키기 위한 문화 사업으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이 수집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두, 가방, 담배 파이프, 만년필, 골프채 등…. 그렇게 그가 수집에 공을 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같은 브랜드, 같은 가격의 만년필이라 해도 펜촉마다 각자 개성이 다르고 약간씩 품질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재미있어 했다.
“수십만 개가 같은 모양으로 찍혀 나오지만 그중에서 특히 좋은 것은 2, 3%에 불과하다. 흔히 사람들은 고급품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에게 내가 수집한 ‘워터맨’ 펜촉으로 써서 보여주기도 하고 직접 써보게도 했더니 모두 내 말이 옳아 깜짝 놀랐다.”
소품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골프채로 500여 개에 달했다. 골프채에 대한 애정이 그토록 각별했던 이유는 골프가 인생과 사업을 배우는 또 하나의 교재였기 때문이었다.
골프장을 찾으면 먼저 각 홀을 공략할 경기 계획을 세워야 한다. 홀에서 홀 사이를 걸으면서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경사를 가늠한다. 그리고 경기 흐름에 따라 공격할 때와 방어할 때를 명확히 판단해야 한다.
이병철 회장은 골프를 할 때 이런 원칙들을 충실히 지켜 홀인원을 세 번 기록했다. 아마추어로서는 보기 드문 기록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필드를 제압하면서 얻은 지혜들을 사업에도 적용해 하나둘씩 문제를 풀어나갔고 그 덕분에 사업에서도 멋진 홀인원을 기록했다.
또 그에게 종종 골프장은 사람의 진면목을 보는 장소이기도 했기에 그는 필드 위에서 수많은 경영자, 정치가, 학자, 문화계 인사와 만났다.
“골프를 칠 때 그 사람의 인간성과 인생관이 가감 없이 노출된다. 특히 내기 골프는 상대방의 성격과 심성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지.”
당시 고위층 인사들, 최고경영자들과 함께하는 ‘수요회’라는 모임도 있었는데,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내기 골프를 즐겼다. 타당 1000원짜리 내기 골프로 플레이가 끝나면 스코어 카드를 보며 타수를 정산하는 식이었다.
수요회에서 몇천 원을 따면 아무리 대기업의 총수라고 해도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사실 이들에게는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
내기는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해주는 일종의 자극제였다. 이병철 회장 뿐 아니라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워런 버핏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내기 골프를 쳤다고 한다. 대부호들의 내기였지만 걸린 돈은 단돈 1달러였다.
간혹 내기에서 지기 싫어하여 화를 내고 돈만 탐내는 사람과 골프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이병철 회장은 예의를 다해 그날의 플레이를 마치고 다음부터 그와 상종하지 않았다.
“골프는 신사도가 기본이다. 승부 이전에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며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그는 그 외에도 스코어를 속이거나 거짓말하는 사람,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 예절을 지키지 않고 고성을 내거나 목욕탕에서 누워서 자는 등 골프장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도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의 골프에 대한 애정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한겨울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설경이 좋다”라며 골프를 즐겼다. 날씨가 추워도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없었다. 꼭 18홀을 다 돌았다.
1976년 가을, 일본에서 위암 수술을 받고 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골프는 못하더라도 수요회에 참가해 차를 마시면서 예전의 분위기를 즐겼다.
“잔디가 누렇게 되었구나. 하긴 언제나 푸를 수는 없겠지.”
이병철 회장은 자신이 지은 안양골프장의 가을 잔디를 보고 안타까워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옆에서 듣던 큰딸 이인희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께서 저리 마음 아파하시다니,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잔디가 누렇게 변한 곳에 초록 물감을 칠하세요. 일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봤습니다.”
임시방편으로는 꽤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비라도 오면 물감이 번져 보기가 흉했다. 하는 수 없이 그 다음번에는 색칠한 그린(Green, 골프 코스에서 퍼팅을 하기 위해 잔디를 짧게 깎아 정비해둔 지역)을 비닐로 덮어두었다가 이병철 회장이 나오는 수요일과 일요일에만 벗겨 푸르름을 내보였다.
1987년 10월. 낮부터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이날도 이병철 회장은 안양골프장을 찾았다. 그는 직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난해인 1986년 폐암 선고를 받고 암 투병 중이었다. 그는 2층에서 창을 통해 그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보보시도장(步步是道場, 한 걸음 한 걸음 도를 닦는 것을 뜻함), 이것이 인생이다!
사람은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닦고 스스로를 닦아 가기를 멈출 때 죽음이 시작된다”라고 말해온 그에게는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남아 있었다. 특히 반도체 사업은 시작 단계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후회도 아쉬움도 남기지 말자.’
비가 그치고,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골프화를 가져오게.”
뜻밖의 지시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이강선 프로골퍼가 서둘러 골프화와 공, 골프 클럽, 골프 카트를 준비해갔다.
“한번 쳐보시겠습니까?”
“그러지.”
공이 잘 맞을 리 없었다. 첫 번째 샷은 헛스윙이나 다름없었고 두 번째 샷도 약 10미터 나가는 데 그쳤다.
“이 군도 치지.”
프로골퍼 이강선이 샷을 날렸다. 시원스레 공이 날아갔다. 이병철 회장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뜨거웠던 해가 기울고 노을이 지면 지나간 하루를 아쉬워한다. 하지만 어김없이 해는 떠오르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그의 미소는 ‘그래, 내가 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삼성을 이어 받아 이렇게 시원한 샷을 날려주겠지’ 하고 안도하는 듯 보였다.
“가세.”
그는 앞장서서 갔다. 그때부터 평상 시와 같이 플레이를 진행했다. 세 번째 홀에 다다르자 이제 사면이 어두워졌다. 조금이라도 더 그린에 머물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골프장에 있던 골프 카트 네 대, 오토바이 세 대, 차에 달려 있는 헤드라이트를 모두 밝혀 그들이 걸어가는 곳을 비췄다. 그러나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손과 다리에 힘이 풀렸다.
“회장님, 그만 들어가시죠.”

“그래, 들어가지.”
들어가다가 현관 즈음에서 이병철 회장이 부탁했다.
“그린을 좀 돌아주겠나?”
당시 현관 앞에는 모형 그린이 있었다. 그는 카트를 탄 채 그 그린을 세 바퀴 돌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했다. 이날이 그가 그린에 선 마지막 날이었다.
그로부터 20일 후인 1987년 11월 19일 오후 5시 5분, 이병철 회장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거인, 20세기를 산 21세기형 기업가, 이병철 회장은 78세 나이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병철 회장 연보>
▲1910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곡리 출생 ▲1922 지수보통학교 3년 편입, 서울 수송보통학교(초등학교) 편입 ▲1925 서울 수송보통학교 4년 수료 중동중학교 속성과 편입 ▲1926 중동중학교 본과 입학, 박두을 여사와 결혼 ▲1929 중동중학교 4년 수료 ▲1930 일본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정치경제학과 입학 ▲1931 와세다대학교 중퇴 ▲1936 경남 마산에 협동정미소 창업 ▲1938 삼성상회 설립 ▲1939 조선양조 인수 ▲1948 서울에 삼성물산공사 설립 ▲1951 부산에 삼성물산 설립

<끝>
*'경제거인 시리즈' 다음주부터는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