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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더 찬란하게 사랑할 거야 '세계의 주인'

등록 2025.10.22 05:56:00수정 2025.10.22 06: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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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 신작 '세계의 주인' 리뷰

[클로즈업 필름]더 찬란하게 사랑할 거야 '세계의 주인'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세계의 주인'(10월22일 공개)은 윤가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개척한다. 그의 영화 주인공이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디딘 초등학생 여자 아이에서 성인이 되기 직전인 고등학생 여자 청소년으로 성숙했다는 건 이 진화의 징후다. '우리'라는 한정되고 닫힌 호명을 넘어('우리들' '우리집') 세계라는 무한하고 열린 단어를 제목에 등장시킨 건 확장의 징표일 게다. 개인의 속내를 포착해 신중하고 정교하게 담아내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마음과 마음이 모이고 연대해 운동하는 것까지 보고 나면 이 작품이 윤 감독의 새 챕터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사려깊은데다가 적극적이기까지 한 '세계의 주인'은 타성에 젖어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하는 최근 한국영화계에 그래도 남아 있는 저력이 돼준다.

고등학생 주인(서수빈)의 주도적 키스가 담긴 첫 장면은 이 영화가 앞으로 무엇을 다루게 될지 암시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드러낼지 선언한다. '세계의 주인'은 에둘러 가거나 피해 가는 법 없이 직격하려 한다. 그러니까 수호가 주도한 서명 운동에 전교생 중 유일하게 동참하지 않은 주인이 수호의 거듭된 설득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수호의 운동 방식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데 거리낌 없는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주제를 다루는 태도나 다름 없다. '우리들'(2016)과 '우리집'(2019)에서 얼마든지 서정적일 수 있다고 증명한 윤 감독은 이 문제만큼은 불편하더라도 직면하고 직시해야 하며, 더 정확하면서 더 예리한 메시지를 내놔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클로즈업 필름]더 찬란하게 사랑할 거야 '세계의 주인'


'세계의 주인'은 고발하는 게 아니라 증언한다. 성폭력이 소재인 대개의 영화가 피해의 참상을 까발리거나 처벌의 지난함을 비판하거나 피해 회복 과정의 고통을 목도케 하는 것과 달리 '세계의 주인'은 생존 이후에도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삶을 얘기하며 그것 역시 찬란하다고, 그럴 수 있다고 입증하려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토록 빛나는 게 무엇이 잘못된 거냐고 반문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인의 아픔을 담아내는 것보다 이 아이의 성격과 일상을 보여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이를 통해 주인이 그 자체를 공들여 구체화한다. 이주인은 장난기 많고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 종잡을 수 없는 여자친구, 친구 같은 딸, 엄하면서 다정한 누나, 착실한 제자다. 짐작조차 되지 않는 그 고통 속에서도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어떤 형태의 피해자다움도 거부한다. 그것이 악의든 선의든 피해자다움을 규정하고 강요할 순 없다고 주장한다. 흔히 피해자다움은 피해를 탄핵하고 공격할 때 활용된다고 여겨지는데, 그 뿐만 아니라 피해를 인정하고 보호하려 할 때에도 종종 오용되면서 피해자성을 반복해서 강요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 피해가 여전히 종종 아프다. 주인이는 때로 세상이 원망스럽고 미도는 아직도 용서가 안 되니까. 그래도 그들은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웃고 떠들고 화내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일하고 돈 벌고 꿈꾸고 사랑한다. 말하자면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다움을 주인다움으로, 세계의 모든 주인다움으로 맞받아치려는 시도다.

연대는 바로 그 주인다움을 지탱한다. '세계의 주인'은 성폭력 생존자의 피해 회복은 개인의 극기가 아니라 사회의 합심을 통해 비로소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것 같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만남만이 연대가 아니라 주인이가 어렵기 만하지만 어떤 선입견 없이 좋아했던 찬호도, 주인이를 위해 체육관 문을 열어준 관장님도, 쉬지 않고 장난을 치는 같은 반 친구들도, 가해자에게 온 편지를 숨겨놓은 동생도, 결코 딸 곁을 떠나지 않고 그 모든 죄책감을 온몸으로 견디는 엄마도 모두 연대다. 이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 것인지 짐작하고 느낄 수 있기에 주인은 "난 괜찮다"고 말할 수 있고, 장래희망을 드디어 쓸 수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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