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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조선과의 대화…BMW i4 M50과 파주[드래블]

등록 2025.12.28 1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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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시 ‘율곡선생 유적지’ 앞에 선 BMW의 ‘i4 M50 Gran Coupe’. *재판매 및 DB 금지

경기 파주시 ‘율곡선생 유적지’ 앞에 선 BMW의 ‘i4 M50 Gran Coupe’.  *재판매 및 DB 금지



모두가 타보고 싶은 차와 누구나 가보고 싶은 여행지.

둘의 만남을 하나씩 기록하고자 합니다. '드래블'(Dravel)입니다.

'드라이브'(Drive)와 '트래블'(Travel)을 합한 시리즈 이름처럼 주목받는 차와 함께하는 특별한 여정을 생생하게 전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김정환 관광전문 기자 = 최첨단 과학문명을 상징하는 전기차, 그중에서도 고성능 스포츠카로 떠나는 역사 여행…. 처음엔 ‘생뚱맞네’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흥미로웠다.

그래서 11월 어느 날, 늦가을이라 더 운치 있어진 조선의 역사 속으로 떠났다.

행선지는 경기 파주시. BMW의 고성능 전기차 ‘i4 M50 xDrive Gran Coupe’가 나의 말이 돼줬다.

i4 M50은 544마력, 81.1kg·m의 토크, 3.9초 제로백을 자랑한다. 말로만 듣던 성능을 한 번 느껴보기 위해 강변북로와 자유로, 서울문산고속도로를 잇는 경로를 정했다.

평일인데도 강변북로 일산 방향은 차가 많았다. 일단 스마트 크루즈를 이용해 나도, 차도 편안하게 달리기로 했다.

경기 고양시 자유로 구간에 접어든 뒤, 곧 우측으로 빠져서 서울문산고속도로에 올랐다.

차량 흐름은 한산했다. 이제 가둬뒀던 명마를 마음껏 달릴 수 있게 풀어놓을 순간이었다.

가속 페달을 밟자, 아니 살짝 힘을 가했을 뿐인데 차는 달리는 게 아니라 ‘순간 이동’을 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직접 느껴봐야 한다.

그러나 그냥 ‘세다’가 아니었다. ‘세지만 부드럽다’였다. 전기차 특유의 순간적인 힘이 있어도 출력은 언제나 정확하게 조절돼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과장 없이 딱 필요한 만큼이었다.

속도계가 빠르게 상승해도 차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앞·뒤 차축에 하나씩 배치된 두 개의 전기모터가 xDrive 시스템을 통해 구동력을 배분한 덕에 직선 가속에서도 차는 노면에 밀착하듯 전진했다. 직선 가속감은 찰나였으나 안정감은 길게 이어졌다.
경기 파주시 ‘황희 유적지’ 내 ‘반구정’.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경기 파주시 ‘황희 유적지’ 내 ‘반구정’.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황희, 명재상의 자취

첫 목적지는 문산읍 ‘황희 유적지’였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명재상이자 조선 최고의 청백리로 꼽히는 방촌 황희(1369~1452)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황희는 고려 시대 공민왕 때 벼슬에 올라 우왕, 창왕, 공양왕 등 망국의 왕을 모셨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역성혁명으로 개국한 나라에서 관리를 지낼 수 없다”며 동료 70여 명과 두문동에서 은둔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관직에 나섰다.

조선 제1대 태조부터 제4대 세종까지 55년간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세종 때에는 19년간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을 지내면서 농사 개량, 예법 개정 등 많은 업적으로 세종의 태평성대를 뒷받침했다. 1452년(문종 2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유적지에는 묘소(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소재)는 없다. 1455년(세조 1년) 후손들이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유업을 기리기 위해 꾸민 ‘방촌 영당’(경기도 기념물 제29호),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임진강변 기암절벽 위에 직접 세우고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반구정’(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후세에 황희의 업적과 유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된 ‘방촌기념관’ 등이 자리한다.

이 일대는 임진강을 경계로 북한과 마주 보고 있다. 6·25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영당과 반구정은 모두 불탔다. 영당은 1962년, 반구정은 1967년 복원됐다.

반구정은 복원할 때 원래 위치가 아니라 조금 아래쪽에 터를 잡았다. 원래 위치에는 ‘앙지대’라는 또 다른 정자가 지어졌다.

반구정(伴鷗亭)은 ‘갈매기를 벗 삼는 정자’라는 뜻이다.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희가 한양(서울)도 아닌 파주에서 여생을 보낸 이유는 뭘까. 결과적으로 고려를 배신하고, 조선에서 최고위직에 올랐던 그로서는 고향인 고려 수도 개경(개성)에 직접 가지 못해도 가까이에서 바라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BMW의 ‘i4 M50 Gran Coupe’ 운전석. (사진=BMW코리아) *재판매 및 DB 금지

BMW의 ‘i4 M50 Gran Coupe’ 운전석. (사진=BMW코리아) *재판매 및 DB 금지


◇시대를 읽은 율곡

다음은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의 흔적을 밟는 것이다. 법원읍 자운서원로 ‘율곡선생 유적지’로 향했다.

i4 M50는 국도 위에서 고속도로와 다른 매력을 뽐냈다.

급커브 구간이 많은 국도에서는 ‘슬로 인, 패스트 아웃’(Slow in, Fast out)을 자주 해야 한다.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올리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 차는 가속 페달을 살짝만 눌러도 필요한 힘을 즉각 내줬다. 그러면서도 과하지 않았다. 전기차 특유의 울컥거림도 없었다.

핸들링 역시 정확했다. 반 템포 먼저 반응하면서도 과한 기교 없이 움직인다. 특별한 시트가 온몸을 잡아줘서인지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차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이 국도 주행에서 가장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매력을 느꼈다면 국도에서는 운전의 묘미를 즐겼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경기 파주시 ‘율곡선생 유적지’ 내 ‘율곡기념관’’.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경기 파주시 ‘율곡선생 유적지’ 내 ‘율곡기념관’’.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유적지는 크게 3개 영역으로 나뉜다. ‘율곡기념관’과 ‘자운서원’ 그리고 ‘가족 묘역’이다.

기념관은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다양한 볼거리와 영상물이 가득하다.

자운서원(경기도 기념물 제45호)은 1615년(광해군 7년)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650년(효종 원년)에 ‘자운’(紫雲)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돼 터만 남게 됐으나, 1970년 지역 유림이 모은 기금과 국가 지원으로 복원했다.

자운산 기슭에는 율곡의 가족 묘 15기가 모여 있다. 가장 윗자리에 율곡과 부인 곡산 노씨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15호)가 전후합장 묘 형태로 자리했다. 그 아래 맏형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 그 아래에 부친 이원복과 모친 신사임당의 합장묘(경기도 기념물 제14호)가 있다. 가장 아래쪽은 율곡의 맏아들 이경림의 묘다.

후대 사람들이 조선 시대 다른 학자들보다 율곡을 추앙하는 이유는 그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 때문이다. “10만 군사를 미리 양성해 외침에 대비하자”는 주장은 선조와 당시 권력자들에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타계하고 10년도 안 된 1592년부터 7년간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었기에 두고두고 안타깝게 여겨진다.

경기 파주시 ‘율곡선생 유적지’ 내 ‘자운서원’.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경기 파주시 ‘율곡선생 유적지’ 내 ‘자운서원’.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그의 예측이 얼마나 신기(神奇)에 가까웠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곳이 파주시 율곡리 임진강변 ‘화석정’(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이다.

원래 고려 말 유학자 야은 길재가 세운 정자인데, 율곡은 은퇴한 이곳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 가던 선조가 어둠과 폭우로 길이 막혀 당황하고 있을 때 동부승지였던 백사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강가를 밝혀 임진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평소 율곡이 제자들과 정자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발라둔 덕이라고 전해진다.

왜란이 끝난 뒤 복원됐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됐다. 지금의 건물은 1966년 유림이 성금을 모아 다시 세웠다.

밖으로 나오니 i4 M50 위로 늦가을 햇빛과 단풍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낮고 길게 뻗은 차체와 완만하게 떨어지는 루프 라인 위에 흐르듯이 얹혔다.

전기차 특유의 매끈한 면 위에 BMW M 특유의 긴장감 있는 선들이 겹쳐져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나갈 것 같은 자세였다.

4도어인데도 실루엣은 세단보다 쿠페에 가까웠다. 차체 하단은 바닥에 눌러 붙은 듯 안정적이었다. 그 모습은 공학과 미학을 모두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BMW의 ‘i4 M50 Gran Coupe’ 주행 모습. (사진=BMW코리아) *재판매 및 DB 금지

BMW의 ‘i4 M50 Gran Coupe’ 주행 모습. (사진=BMW코리아) *재판매 및 DB 금지


◇인조, 선택의 무게

끝으로 향한 곳은 탄현면 장릉로 ‘장릉’(長陵)이었다.

조선 제16대 인조(1595~1649)와 첫 부인 인열왕후가 합장된 능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왕과 왕비가 봉분 하나에 함께 잠든 곳이다.

장릉으로 향하는 길은 고요하고 엄숙했다.

그 길을 올곧이 느끼는 데는 이 차가 정말 어울렸다. 노면음, 풍절음, 모터음이 거의 ‘소멸’ 수준이어서였다. 심지어 가속할 때도 그랬다.

능 주변 도로는 굴곡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i4 M50은 출렁임이 눈에 띄지 않았다. 노면 요철이 많은 국도 위에서도 ‘어댑티브 M 서스펜션’은 전기차 특유의 정숙성을 극강화했다.

고속에서 안정감이 유지되는 구조적 특징이 능 주변의 느릿한 속도에서도 편안함으로 이어졌다. ‘전기차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i4 M50 자체가 울림을 줄이도록 설계돼 있구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경기 파주시 ‘장릉’.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경기 파주시 ‘장릉’.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1623년 인조(능양군)는 소외된 서인 세력을 규합해 직접 반정을 일으켜 당숙인 제15대 광해군(1575~1641)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랐다. 명분은 광해군의 실정을 바로 잡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뒤에는 부국강병보다는 광해군과 북인 세력 척결에만 열을 올렸다. 심지어 ‘율곡의 후예’인 서인들마저 10만 양병을 실천하기는커녕 권력 강화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국제 정세 변화에 어두웠던 조선은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한 후금(훗날 청)과의 충돌 속에서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연이어 겪었다. 나라는 다시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특히 인조는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온 장남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혹의 정점에 서 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꿈꾸던 세자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제기된다.

만일 소현세자가 왕이 돼 조선이 200년을 앞당겨 개화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인조의 능 앞에 최첨단 차량이 섰다. 하늘나라에서 그가 이 차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BMW의 ‘i4 M50 Gran Coupe’ 1열. (사진=BMW코리아) *재판매 및 DB 금지

BMW의 ‘i4 M50 Gran Coupe’ 1열. (사진=BMW코리아) *재판매 및 DB 금지


조선의 역사 속에서 현재로, 파주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영국 역사학자 E.H. 카(1892~1982)의 말처럼 여러 생각이 겹치는 시간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i4 M50의 주행 보조 시스템은 차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차분히 나아갔다. 각종 소음이 억제된 공간에서 하만 카돈 오디오의 볼륨을 조금 낮췄다. 어느덧 차는 이동 수단이라기보다 사유의 공간에 가까워졌다.
 
그 옛날 본능에 충실하기보다 주인의 뜻을 헤아린 말들이 명마로 꼽혔듯, i4 M50 역시 질주 자체보다 흐름을 읽는 능력이 돋보이는 명차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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