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크리마' 응우옌 연출 "웨딩드레스 뒤 '사람의 얼굴' 있죠"
등록 2026.09.15 08:27:09수정 2026.09.15 09:16:25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 연극 '라크리마' 한국 초연
영국 왕실 웨딩드레스 뒤에 숨겨진 노동과 눈물 다뤄
"관객들이 웨딩드레스 통해 시간의 무게 실감하길"

연극 '라크리마' 공연 장면. (사진=성남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김주희 기자 = "자신의 직업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불공정한 노동 시스템과 자본 논리로 인해 고통받을 수 있죠."
화려한 왕실 웨딩드레스 한 벌에 수천 시간의 노동이 쌓인다. 캐롤린 기엘라 응우옌 연출 겸 극작가가 연극 '라크리마'를 통해 아름다움 뒤에 가려진 장인들의 삶과 고통을 무대 위에 펼쳐낸다.
응우옌 연출은 뉴시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이러한 모순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며 노동 착취의 현실과 자신의 기술에 자부심을 지닌 장인들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라크리마'는 다음달 2~3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오른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이 2024년 첫선을 보인 작품으로, 한국을 찾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야기는 영국 공주의 웨딩드레스 제작이라는 가상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드레스 한 벌이 완성되는 과정을 따라 파리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와 프랑스 알랑송의 레이스 공방, 인도 뭄바이의 자수 공방을 오가며 화려한 패션 산업 이면에 숨겨진 노동 현실을 들여다본다.

연극 '라크리마' 캐롤린 기엘라 응우옌 연출. (사진=성남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응우옌 연출은 '옷 만드는 일'을 소재로 한 것에 대해 "완성된 웨딩드레스가 가진 극단적인 가시성과 그것을 만든 사람들,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장인들이 가진 완전한 비가시성 사이의 대조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단 하나의 물건 뒤에도 자본주의와 역사, 지리, 계급과 지정학적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제목인 '라크리마(Lacrima)'는 라틴어로 '눈물'을 뜻한다. 작품에서 드레스 위에 수놓인 진주는 눈물을 연상시키지만, 제목은 작품 소재보다 먼저 정해졌다.
응우옌 연출은 "작품이 정확히 무엇에 관한 것인지 정해지기 훨씬 전부터 '우리 시대의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진주와 레이스, 오트 쿠튀르와 장인들의 노동은 창작 과정에서 구체화됐다. 그는 "이 소재들이 우리 시대의 고통과 취약함, 그리고 우리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유대를 드러내는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웨딩드레스가 완성되는 과정을 따라 이야기는 파리와 뭄바이, 알랑송을 넘나든다. 무대 위 스크린의 3분할 화면을 통해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대의 작업 환경이 교차하며 24시간 멈추지 않는 글로벌 생산 구조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응우옌 연출은 "파리에서 하루가 저물 때 뭄바이의 누군가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 뭄바이가 잠들면 세계의 다른 곳에 있는 또 다른 생산 라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며 "매 순간 지구상의 누군가는 이 드레스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영상은 이 '동시성'을 눈앞에 가시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서로 만나지 않더라도 동일한 드레스를 완성하기 위해 기여하는 사람들과 행위들, 기술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극의 중심에 있는 웨딩드레스는 화려한 볼거리이자 수많은 사람의 시간과 노동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응우옌 연출은 "이 작품에서 웨딩드레스는 의상 요소 그 이상"이라며 "어떤 면에서는 작품 속 암묵적인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처음에는 왕실 웨딩드레스가 아름다움, 사치, 완벽함의 상징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공연이 진행될수록 이 드레스는 제작에 소요된 시간, 드레스에 정성을 쏟은 사람들의 몸, 제작 공정에서의 손과 몸의 동작, 그 뒤에 숨겨진 비밀과 고통을 모두 담아내게 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 걸린 시간을요. 저는 관객들이 웨딩드레스를 통해 시간의 무게를 실감하기를 바랐습니다."
응우옌 연출은 작품을 위해 오트 쿠튀르 작업실과 레이스 공방, 뭄바이의 자수 공방까지 직접 찾아다녔다. 특히 뭄바이에서 마주한 풍경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그는 "전체 창작 과정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감정을 느꼈던 순간도 바로 그곳"이라며 "눈물이 흘렀다. 슬퍼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작업하는 손짓의 아름다움, 공동 작업의 아름다움, 국경과 세대를 초월하는 장인 정신의 아름다움에 압도됐다"고 떠올렸다.
이 경험은 서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유대'에 대한 영감을 주는 동시에, 장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응우옌 연출은 "'부자들의 물건을 만들기 위해 일하는 이 불쌍한 사람들을 보라'고 말하는 것을 무엇보다 원치 않았다. 그것은 그들을 또 다른 방식으로 폄하하고, 결국 그들의 힘을 빼앗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 '라크리마' 공연 장면. (사진=성남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라크리마'는 아비뇽페스티벌과 파리 오데옹극장, 런던 바비컨 센터 등 세계 주요 극장에서 상연됐다. 공연하는 나라의 문화·사회적 배경에 따라 관객들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지점도 달랐다.
응우옌 연출은 "어떤 나라에서는 노동과 생산의 문제를, 또 다른 나라에서는 가정 폭력과 계급 관계, 세대 간 전승이라는 측면에 더 큰 공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번에는 한국 관객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응우옌 연출은 "한국은 현대 패션, 이미지, 사물, 문화의 흐름 속에서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며 "그래서 한국 관객들이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발견할지 무척 궁금하다"고 기대했다.
"관객들이 공연을 보고 거대한 글로벌 경제 시스템과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들 뒤에 언제나 '사람의 얼굴'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극장을 나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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