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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가 보낸 평화의 메시지…'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등록 2022.06.05 16:30:38수정 2022.06.05 21: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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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2022.006.05.  (사진=국립오페라단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2022.006.05.   (사진=국립오페라단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주연 기자 = 무대 한 복판에 하얀 나무가 있다. 파란색과 오렌지색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파란색은 13세기 정복자 프랑스, 오렌지색은 점령된 시칠리아를 상징한다. 그리고 '흰색'은 모두가 마음에 품은 평화다. 공연 내내 파란색과 오렌지색 겉옷을 입은 이들이 서로 반목하고, 서로를 죽인다. 하지만 이들은 평화를 원한다. 화려한 겉옷 안에 입은 흰옷처럼….

'오페라의 거인' 주세페 베르디가 167년 전 보낸 평화와 해방의 메시지가 우리를 찾아왔다. 국립오페라단은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의 대작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를 초연했다. 180분에 이르는 대작이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는 1282년 부활절에 일어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압제에 고통받던 시칠리아인들은 프랑스 군인이 시칠리아 여인을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격분, 성당의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맞춰 프랑스인에 대항한 봉기를 일으킨다.

이탈리아의 젊은 연출가 파비오 체레사는 베르디의 대작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를 새로 해석, 현재의 차별과 보편적인 평화를 이야기한다. 그는 압제자 프랑스인은 파란색, 억압받는 시칠리아인은 오렌지색 의상을 입도록 했다. 이 때문에 두 집단간의 투쟁이 시각적으로 더욱 뚜렷하게 다가온다.

작품에서 시칠리아의 공녀 엘레나는 프랑스 총독 몽포르테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몽포르테는 시칠리아인을 억압하는 프랑스인의 우두머리다. 하지만 엘레나로부터 몽포르테를 제거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연인이자 저항군인 아리고는 몽포르테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정적인 순간 순간적으로 아버지를 보호하고 만다.

아리고는 동료를 배신했다는 생각해 어쩔 줄 몰라하고, 연인 엘레나와 시칠리아 동료들은 그를 경멸하며 끌려나간다. 몽포르테는 아리고가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면 이들을 처형하지 않고 용서해 주겠다고 한다. 처형대에 선 엘레나를 본 아리고는 몽포르테를 '아버지'라 부르고, 몽포르테는 아리고와 엘레나를 결혼시키겠다고 선언한다.

프랑스인과 시칠리아인들은 모두 파란색과 오렌지색 겉옷을 입고 있다. 차마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던 아리고의 옷은 극 전반 오렌지색에서 후반 파란색으로 바뀐다. 하지만 화려한 의상 아래엔 흰옷이 있다. 용서를 선택한 엘레나와 아리고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모두 흰색 옷을 입고 있다. 평화로운 유토피아에서 인간이 가진 순수함을 상징한다.

하지만 시칠리아의 독립을 열망하는 프로치다는 결혼식을 복수의 기회로 삼는다. 엘레나는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갈등한다. "거룩한 종소리가 혼인이 성사되었음을 알릴 것이고, 학살이 시작될 겁니다. 오 하느님! 내가 어느 편을 들어야 하나"(엘레나)

지휘자 홍석원이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젊은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주인공 '엘레나' 역을 맡은 서선영의 고난도 테크닉과 호소력 넘치는 가창, 결기있는 민족지도자 역을 맡은 베이스 최웅조의 카리스마 넘치는 저음이 무대를 꽉 채웠다. 몽포르테역을 맡은 바리톤 양준모와 아리고역의 테너 강요셉도 박진감 넘치는 무대를 꾸몄다.

결국 종소리가 울리고, 프랑스 군인들이 쓰러진다. 이들이 들고 있던 생명을 상징하는 파란 공이 무대 곳곳에 굴러떨어진다.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2022.006.05.  (사진=국립오페라단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2022.006.05.   (사진=국립오페라단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체레사는 "베르디의 작품에서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번 작품의 목적"이라며 "관객들이 이런 개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의상 디자인을 추상화했다"고 설명했다.

작품에서 몽포르테는 모든 재산을 누리고 그것을 타인을 억압하는 도구로 삼는 현대의 특권층 남성을, 시칠리아인들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노예화되는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프로치다는 정치적 견해 때문에, 엘레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리고는 고아라는 이유로 차별받는다.

사랑에 빠진 엘레나와 아리고는 평등하고 보편적인 평화를 열망한다. 몽포르테가 부성애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 두 사람의 결혼과 두 민족의 화해를 추진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프로치다와 같은 인물들이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간의 전복을 꿈꾸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3세기의 역사적 투쟁 장면을 다루지만 대단한 현대성을 지녔다. 정치적 대의명분을 위해 개인의 행복과 평화가 희생돼도 되는 지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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