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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밭으로 시작한 ‘삭는 미술’…보존을 흔드는 국립현대미술관

등록 2026.01.29 14:58:59수정 2026.01.29 1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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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학예연구사 ‘삭는 미술’로 보존의 제도에 도전

소멸의 시학, 분해와 변화, 순환 전제로 한 작업

국내외 작가 15인(팀) 회화, 조각, 설치 등 50 점

배우 봉태규 전시 오디오 가이드 재능 기부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작가 아사드 라자(Asad Raza)의 작품 '흡수'를 선보이고 있다. '흡수'(2026)는 서울에서 나온 폐기물을 뒤섞어 작가가 네오소일(Neosoil, 서울대학교 토양생지화학 연구실의 실험과 자문, 공개 모집된 시민 경작자들의 정성 어린 손길로 제작된 흙)이라고 부르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고 원하는 이들에게 분배하는 작품이다. 2026.01.29.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작가 아사드 라자(Asad Raza)의 작품 '흡수'를 선보이고 있다. '흡수'(2026)는 서울에서 나온 폐기물을 뒤섞어 작가가 네오소일(Neosoil, 서울대학교 토양생지화학 연구실의 실험과 자문, 공개 모집된 시민 경작자들의 정성 어린 손길로 제작된 흙)이라고 부르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고 원하는 이들에게 분배하는 작품이다. 2026.01.2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삭는다. 죽어야 산다. 자연의 순환이 미술관 한복판에서 발효된다.

전시는 흙밭으로 시작한다. 하얗게 정돈된 미술관 바닥 대신,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고르게 다져진 흙이다. 작품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인간이 아니라 땅의 시간이다.

국립현대미술관(MMCA)은 30일부터 5월 3일까지 서울관 6·7전시실과 전시마당에서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를 개최한다. 분해와 변화, 순환을 전제로 한 작업들을 통해 미술관의 보존 중심 제도와 인간 중심적 사고를 근본에서 되묻는 전시다. 전시는 이주연 학예연구사가 기획했다.

‘삭다’라는 우리말에는 ‘썩은 것처럼 되다’와 ‘발효되어 맛이 들다’라는 상반된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 전시에 참여한 작품들은 분해를 손상이나 실패가 아닌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비인간 존재와 공존하고 자연의 순환에 참여한다. 전시는 이러한 변화를 미술관이 수용할 수 있을지,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묻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이주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가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진행하고 있다. 2026.01.29.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이주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가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진행하고 있다. 2026.01.29. [email protected]



국립현대미술관의 다크호스로 불리는 이주연 학예연구사는 “변화하는 물질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미술 제도를 이루는 관념 자체가 이제는 바뀔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전시가 시작됐다”며 “생산·소비·축적의 흐름에서 벗어나, 공유와 순환이 가능한 방식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시는 ‘서막’과 1막 ‘되어가는 시간’, ‘막간’, 2막 ‘함께 만드는 풍경’ 등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며, 국내외 작가 15인(팀)의 회화, 조각, 설치 등 50여 점을 선보인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작가 에드가 칼렐(Edgar Calel)의 작품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를 선보이고 있다. 작품은 자연과 공존해 온 고대 마야인들의 지혜를 전하는 동시에, 작품의 가치를 지속하고 공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상상하는 사례를 제공한다. 2026.01.29.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작가 에드가 칼렐(Edgar Calel)의 작품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를 선보이고 있다. 작품은 자연과 공존해 온 고대 마야인들의 지혜를 전하는 동시에, 작품의 가치를 지속하고 공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상상하는 사례를 제공한다. 2026.01.29. [email protected]


보존을 거부하는 작품들, 미술관과 충돌하다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보존’과의 충돌이다. 해조류, 흙, 과일, 불, 미생물 등 시간에 따라 변형되고 분해되는 재료를 사용하는 작품들은 먼저 ‘냄새’로 관람객을 이끈다.

전시장에 실제 흙밭을 조성한 아사드 라자의 '흡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커피 찌꺼기, 택배 상자, 닭 뼈, 은행, 소나무 잎, 이면지, 전선 피복, 튀김 부스러기 등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나온 부산물로 흙을 만든다. 전시 기간 동안 꾸려진 경작자 팀은 이 흙을 돌보고 분석하며 관객과 흙에 대한 앎을 나눈다. 관객은 준비된 주머니나 개인 용기를 이용해 필요한 만큼의 흙을 가져갈 수 있고, 재생된 흙은 다시 자유롭게 흩어진다.

작가는 흙이 특정 이념이나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와 연결된 존재임을 강조한다. 공동체의 경험이 새겨진 아카이브이자 토대로서의 흙을 되살리고 나누며, 작품은 분해에 내재한 공동성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주연 학예연구사는 “미술관은 오랫동안 ‘불후의 명작’을 보존하는 제도로 기능해 왔지만, 분해를 존재 조건으로 삼는 작품은 그 역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긴장은 미술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계란 노른자 안료를 사용하는 이은재 작가의 작업은 ‘썩기 때문에 팔 수 없다’는 이유로 미술 시장에서도 거리감을 둔다. 이 학예연구사는 “미술관과 미술 시장은 서로 다른 제도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 가치가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며 “지속되길 바라는 욕망 앞에서 두 제도는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고 분석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작가 이은재의 작품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을 선보이고 있다. 2026.01.29.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작가 이은재의 작품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을 선보이고 있다. 2026.01.29. [email protected]


‘저자성의 후퇴’, 인간은 한 발 물러난다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저자성의 후퇴’다. 인간이 유일한 창조자이자 의미의 주체라는 자리에서 물러나, 물질과 시간, 비인간 존재들이 작품의 일부가 되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태도다.

전시장 입구에 깔린 흙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는 관객의 진입을 막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흙과 함께 공존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초대하는 조건이다. 불을 전시장 안으로 들이는 대신, 불이 지나간 흔적만 남긴 선택 역시 스펙터클을 거부한 결정이다.

이 학예연구사는 “강한 행위를 보여주는 대신 메시지가 훼손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며 “중요한 것은 얼마나 파워풀하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느냐”라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작가 여다함의 작품 '향연'을 선보이고 있다. '향연'은 향이 타며 피어오르는 연기의 움직임을 ‘춤’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2026.01.29.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작가 여다함의 작품 '향연'을 선보이고 있다. '향연'은 향이 타며 피어오르는 연기의 움직임을 ‘춤’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2026.01.29. [email protected]



‘되어가는 시간’을 공유하다

1막 ‘되어가는 시간’에서 작품은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이행하는 시간으로 제시된다. 작품이 겪는 시간이 찰나인지 억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며 수행하고, 인간의 손뿐 아니라 작품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하나의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여다함의 '향연'은 이러한 인식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향이 타며 만들어내는 연기의 움직임을 ‘춤’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이다. 작가는 2019년부터 뜨개질로 향로를 만들어 왔는데, 이는 형상을 만드는 기술이라기보다 현상을 붙잡는 행위에 가깝다. 반복되는 뜨개질의 리듬은 질서와 무질서 사이를 횡단하며, 연기가 추는 춤과 닮아 있다.

2막 ‘함께 만드는 풍경’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호흡하며 만든 장면들이 펼쳐진다. 천, 항아리, 마른 꽃, 발효액, 곤충과 곰팡이가 함께 작동하는 댄 리(Dan Lie)의 작업은 미술관을 살아 있는 생태계로 바꿔 놓는다. 에드가 칼렐의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는 자연과 공존해 온 고대 마야인의 지혜를 현재로 불러오며, 작품의 가치를 지속하고 공유하는 또 다른 방식을 상상하게 한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6.01.29.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6.01.29. [email protected]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얼음이 그대로 담긴 댄리의 항아리. 2026..1.29.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얼음이 그대로 담긴 댄리의 항아리. 2026..1.29.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 전시에 참여한 브라질 출신 작가 댄 리는 10년 넘게 애도와 죽음의 실천을 작업의 중심에 두고 활동해 왔다. 그는 “아주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이 전시를 맞이했다”며 “이번 작업은 나에게 하나의 동결과도 같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놓인 직물과 오브제들은 새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과거 작업에서 사용했던 재료를 다시 수집해 재구성한 것이다. 강황으로 염색된 직물은 햇빛에 노출될수록 점차 색이 옅어진다. 변화와 소멸은 손상이 아니라, 작품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일부 재료에는 한국의 전통 직물과 볏짚을 꼬아 만든 전통 끈이 사용돼, 작가는 이를 “현지 문화와의 대화”라고 설명한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인간 주체의 탈중심화를 실험하는 댄 리의 작품은 미술관으로 하여금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작품’으로서 함께 돌볼 것을 요구한다. 식물성 액체가 담긴 도자기는 발효되며 냄새를 풍기고, 씨앗이 심긴 진흙에서는 싹이 올라온다. 어느 구석에서는 버섯이 피거나 달팽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작품 보존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낮은 습도는 이 작업에 치명적이다. 그에게 ‘안전한 환경’이란 생성과 부패, 소멸의 과정을 허용하는 생태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에는 소멸이 예정돼 있다. 작가는 작품을 쌓아 두기 위한 창고를 운영하지도, 작품을 축적하지도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에 따라 5년 이내에 다른 누군가에게 소장되지 않은 작품은 흙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작품이 된다. 2026년은 이 작품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해가 될 것이다.

한편 유코 모리가 썩어 가는 과일로 빛과 소리를 발생시키는 '분해'는, 죽은 사람의 몸이 아홉 단계로 변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일본 전통 불화 '구상도'에서 출발한다. 일본의 옛 스님들이 이 그림을 보며 육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 냈듯, 작품은 필멸성을 환기한다. 그러나 불교가 말하는 무상이 상실이 아니라 순환을 가리키듯, '분해'는 서로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 에너지의 흐름을 감각하게 한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유코 모리의 분해. 일본 전통 불화 '구상도'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유코 모리의 분해. 일본 전통 불화 '구상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이 우뭇가사리 재료를 이용해 만든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6.01.29.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전 언론공개회를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갖고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이 우뭇가사리 재료를 이용해 만든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6.01.29. [email protected]



결국은 우리도 삭는다. 소멸의 시학을 내세운 이 전시는 자연이 사라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중심에서 물러나는 연습에 가깝다. 미술관이 그동안 보존해온 것은 작품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라짐을 받아들이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동시대 환경 인식을 반영한 미술작품의 변화에 주목하고, 그 변화에 부응하는 급진적인 미술관의 모델을 상상하려는 시도”라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탐색하는 공적 역할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배우 봉태규가 이번 전시의 오디오 가이드에 재능기부로 참여했다. 오디오 가이드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안내 앱을 통해 무료로 제공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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