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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내지 마라”…추사, 여덟 제자에게 남긴 ‘그림 수업’

등록 2026.04.03 18:31:38수정 2026.04.03 20:4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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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간송미술관, 추사 김정희 탄신 240주년 기념전

국보 ‘세한도’ 영남 지역 첫 공개

제자 작품 비평문 ‘예림갑을록’ 전면 조명

 ‘1849년, 추사의 그림 수업‘에서 전시 중인 『예림갑을록』과 《팔인수묵산수도》ⓒ대구간송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1849년, 추사의 그림 수업‘에서 전시 중인 『예림갑을록』과 《팔인수묵산수도》ⓒ대구간송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대구=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흉내내지 마라. 중요한 건 너 자신이다.”

19세기 조선,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자들에게 남긴 이 말은 오늘의 미술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3일 개막한 대구간송미술관 기획전 ‘추사의 그림 수업’은 그 질문을 다시 꺼내는 전시다.

추사 김정희 탄신 24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전시는 그가 무엇을 남겼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전시의 중심에는 1849년 여름, 여덟 제자의 작품을 놓고 열린 품평 기록 ‘예림갑을록’이 있다.

제자(이한철·허련·전기·유숙·조중묵·김수철·박인석·유재소)의 그림에 한 장 한 장 비평을 남긴 이 기록에서 추사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를 규정한다.

“서로 다른 전통을 분별없이 섞어 그림의 격식을 해치는 일은 경계하라.”, “옛 화법을 깊이 익히되 그 쓰임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전통을 익히는 것과 전통을 흉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지적이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3일 대구간송미술관 이랑 책임학예사가 '추사의 그림수업' 전시를 설명하고 있다. 2026.04.03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3일 대구간송미술관 이랑 책임학예사가 '추사의 그림수업' 전시를 설명하고 있다. 2026.04.03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그림은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같은 스승에게서 출발했지만 그림은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다.

세 살 차이지만 제자였던 조희룡은 추사를 존경하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핵심 인물이다.

전시에서는 조희룡의 ‘홍백매도’를 비롯해 유숙, 김수철 등의 매화 작품을 통해 추사 화파의 변화와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전통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해석하고 변형하는 과정. 그 지점에서 이들의 작업은 오히려 실험적이다.


그러나 그 끝에서 분명해지는 것도 있다.

제자 여덟 명이 있었지만 끝내 넘지 못한 존재는 추사였다. 그가 남긴 것은 형식이 아니라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추사 秋史, 시대를 열다’에서 전시 중인 〈김정희 초상〉(보물) ⓒ대구간송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추사 秋史, 시대를 열다’에서 전시 중인 〈김정희 초상〉(보물) ⓒ대구간송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제자 이한철이 그린 추사 초상. 근엄한 표정이 아닌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제자 이한철이 그린 추사 초상. 근엄한 표정이 아닌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문인화는 과거를 답습하는 그림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존 화법을 전복하고, 내가 누구인지 끝까지 묻는 그림입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랑 책임학예사는 “형식을 좇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자신을 속이지 않을 때 비로소 다른 경지에 도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지점에서 문인화의 의미가 바뀐다”며 “고루한 양식이 아니라 가장 급진적인 회화가 된다”고 분석했다.

추사는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예술가였다.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학문 체계를 세운 문인이자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통합적 지식인이었다.

이랑 학예사는 “추사는 조선을 넘어 동북아시아 지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던 19세기 문화 아이콘”이라며 “학문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경지를 이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기존의 추사 전시와 다르게 ‘그림’에 집중한다. 고증학이나 서예 중심이 아니라, 회화를 통해 추사의 예술세계를 조망한다.

특히 그의 주요 작품들은 말년에 집중된다. 유배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조형 언어는 오히려 더 정제된다.

이랑 학예사는 “추사는 흔히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작가로 불리지만 이는 단순한 계승이 아니다”라며 “2000년 전 예서·전서의 원전을 집요하게 추적해 다시 조형으로 재구성한 작가”라고 설명했다. “글자 하나를 위해 30년을 기다린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추사 秋史, 시대를 열다’에서 전시 중인 〈세한도〉(국보) ⓒ대구간송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추사 秋史, 시대를 열다’에서 전시 중인 〈세한도〉(국보) ⓒ대구간송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 전시에는 ‘계산무진’을 비롯해 국보 ‘세한도’, 보물 ‘불이선란도’, ‘난맹첩’ 등 추사 화업의 정점에 있는 작품들이 공개된다.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 기증 이후 화제가 됐던 ‘세한도’는 조선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서울과 제주에서만 공개됐던 이 작품이 영남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전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무상 대여했으며, 길이 4m에 이르는 발문까지 함께 공개돼 추사의 사유 구조를 온전히 드러낸다.

또한 제자들의 미공개 작품 7점도 처음으로 소개된다. 위창 오세창이 엮은 ‘근역화휘’에 수록된 작품들로, 조선 말기 추사 화파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랑 학예사는 이번 전시를 “서화일치를 개념이 아니라 장면으로 보여주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추사의 글씨는 획 하나하나가 회화적이다. 그 자체로 이미 ‘그림 같은 글자’다. 이 학예사는 "제자들의 그림은 그 글씨를 다시 회화로 번역한, 즉 추사체가 그림으로 변한 것"이라고 했다.

조희룡 〈홍백매도〉 ⓒ일민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조희룡 〈홍백매도〉 ⓒ일민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이한철 〈매화서옥도〉 ⓒ국립중앙박물관 *재판매 및 DB 금지

이한철 〈매화서옥도〉 ⓒ국립중앙박물관 *재판매 및 DB 금지



김정희 〈고사소요〉 ⓒ간송미술문화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김정희 〈고사소요〉 ⓒ간송미술문화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왜 지금, 추사인가.

“19세기도 전통이 넘쳐나는 시대였습니다. 이미지와 스타일이 복제되던 시대였죠. 결국 문인화는 한 문장으로 귀결됩니다. ‘본인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랑 학예사는 오늘의 미술을 돌아보며 가장 크게 사라진 감각으로 ‘공부’를 꼽았다. “예전에는 시·서·화가 하나였습니다. 공부가 몸에 배면 글씨가 나오고, 그 경지에서 그림이 나왔습니다. 문인화는 삶과 사유가 축적된 결과였습니다."

그는 그림의 정점을 이렇게 정리했다. "예술의 생명성은 어디서 오는가. 결국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입니다.”

추사가 끝내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무자기(毋自欺)’, 즉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상태였다. 형식을 과시하거나 기교에 기대는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내면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추사에게 글씨와 그림은 기술이 아니라 자기 검증의 과정이었다.

K콘텐츠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한국화 등 ‘우리 그림’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지금, “흉내내지 마라”고 했던 추사의 말은 더욱 날카로운 질문으로 돌아온다.

다만 이 전시는 쉽지 않다. 200년 전의 한문 발문과 전통 형식은 오늘의 관람객에게 여전히 낯설다.

도슨트와 영상 해설이 마련돼 있지만 이해는 여전히 ‘설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고미술 전시가 안고 있는 두꺼운 시간의 장벽이다. 전시는 7월5일까지.  

3부, ‘예림(藝林)의 여덟 제자’ 전시장 전경 ⓒ대구간송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3부, ‘예림(藝林)의 여덟 제자’ 전시장 전경 ⓒ대구간송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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