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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피하다 만나는 여름밤 풍경 ①서울 덕수궁

등록 2026.08.10 06:00:00수정 2026.08.10 07:06:23

덕수궁 석조전.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덕수궁 석조전.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해가 저물어도 한여름 태양 아래 달궈진 도시의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날에는 밤공기마저 뜨겁다.

그렇다고 여름밤을 OTT(Over-the-Top)를 보며 에어컨 바람만 쐬며 보내기에는 아쉽다.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면 낮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궁궐 전각의 처마 아래로 은은한 조명이 번진다. 천년 고도의 목조 다리는 강물 위에 또 하나의 모습을 만든다.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 위로 다리와 항구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천루의 불빛이 수면 위로 길게 번진다. 오래된 성곽길은 어둠 속에서 고즈넉한 산책길로 모습을 바꾼다.

바다나 강을 바라보고, 나무 사이나 돌담 곁을 천천히 걷다 보면 한낮에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의 온도도 조금씩 내려간다.


[서울=뉴시스]김정환 관광전문 이주창 인턴 기자 = 서울 한복판에서 가장 손쉽게 만날 수 있는 밤 여행지는 고궁이다.

그중에서도 서울 중구 세종대로 덕수궁은 특별한 야간 행사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문을 여는 덕이다. 오후 8시까지 입장하면 된다. 한여름에는 해가 기울 무렵 대한문으로 들어가면 궁을 천천히 돌아보기에 알맞다.

덕수궁은 조선의 다른 궁궐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 배경에는 남다른 역사가 있다.

원래 조선 제9대 성종(1457~1494)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곳이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도성의 궁궐들이 불타 없어진 뒤 한양으로 돌아온 제14대 선조(1552~1608)가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 제15대 광해군(1575~1641) 재위기인 1611년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얻어 정식 궁궐이 됐다.

제26대 고종(1852~1919)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라 경운궁을 황궁으로 사용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제27대 순종(1874~1926)이 즉위해 창덕궁으로 옮겨간 뒤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종은 태황제로 덕수궁에 머물렀으며,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에 의해 이태왕으로 격하된 채 1919년 서거할 때까지 거처했다.
덕수궁 중화전.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덕수궁 중화전.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대한제국 황궁으로 변모하면서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선 덕수궁에서는 전통 전각과 근대 건축이 한 공간에 어우러진다.

해가 완전히 지면 이 같은 덕수궁의 개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대한문과 중화문을 지나면 대한제국의 정전인 중화전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처마와 단청에 조명이 비치고 주변이 어두워지면서 전각의 선과 색은 낮보다 또렷하게 떠오른다.

준명당·즉조당·석어당·함녕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궁 안은 한층 고요해진다.

낮에는 한눈에 들어오던 전각들이 밤에는 울창한 나무와 어둠 사이에서 하나씩 나타난다. 불을 밝힌 전각과 그 사이의 어두운 마당이 번갈아 이어지면서 낮과는 다른 깊이감도 생긴다.

조금 더 걸으면 풍경이 바뀐다. 서양식 석조건물이 나타난다.

1900년 착공해 1910년 준공한 석조전은 황제의 접견과 업무, 황실 생활을 위해 지은 궁전이다.

밤에는 조명을 받은 석조전의 밝은 외벽과 어둠에 잠긴 주변 전각이 대비를 이루면서 전통 건축과 서양식 건축의 차이가 더욱 뚜렷해진다.

고전주의 양식의 석조전과 전통 전각이 한 궁궐 안에 공존하는 풍경은 덕수궁만의 개성이자 대한제국이 지나온 시간을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다.
덕수궁.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덕수궁.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발길을 옮기면 또 다른 대한제국의 흔적과 마주한다.

서양식 구조에 전통 건축 요소를 접목한 정관헌과 외국 사절을 맞는 영빈관·알현관으로 사용한 서양식 2층 건물 돈덕전은 열강의 각축 속에서 대한제국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 외교를 펼치며 생존을 모색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한여름 밤의 덕수궁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나무가 우거진 궁 안 길을 천천히 걷고, 벤치에 앉아 불 밝힌 전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낮과는 다른 궁을 만난다.

궁 밖에서는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자동차 행렬이 이어지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그 분주함도 한 발짝 멀어진 듯하다.

전각 처마 너머로는 빌딩의 불빛이 보인다.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궁궐과 현대 서울이 한 시야에 들어오는 장면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덕수궁의 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덕수궁 돌담길.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덕수궁 돌담길.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궁을 나서면 덕수궁 돌담길과 중구 정동으로 산책을 이어갈 수 있다.

정동에는 1896년 아관파천의 현장인 구 러시아공사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개화기 교육·종교의 변화를 보여주는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 등이 모여 있다.

국운이 흔들리던 10년을 함께한 대한제국 황궁에서 돌담길을 따라 정동 깊숙이 걸음을 옮기다 보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걷는 듯한 기분에 더위도 잊게 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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