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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를 버린 연인, 화가 프랑소아즈 질로(101) 사망

등록 2023.06.07 10:01:39수정 2023.06.07 1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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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50년 불구 피카소의 6번째 여인으로 더 유명

뉴욕에서 거주하다 심폐질환으로 영면

[AP/뉴시스] 피카소의 6번째 연인으로 그를 버렸던 프랑스 화가 프랑소와즈 질로가 1956년 35세 때 런던에서 "피카소와의 삶" 출간 기념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 AP자료사진) 2023.06.07.

[AP/뉴시스] 피카소의 6번째 연인으로 그를 버렸던 프랑스 화가 프랑소와즈 질로가 1956년 35세 때 런던에서 "피카소와의 삶" 출간 기념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 AP자료사진) 2023.06.07. 

[ 뉴욕= AP/뉴시스] 차미례 기자 = 파블로 피카소의 연인이며 50년 넘게 많은 작품을 그리며 호평을 받은 예술가였던 프랑소아즈 질로가 6일(현지시간) 뉴욕의 한 병원에서 101세의 장수를 누린 뒤 사망했다.

질로는 장구한 세월의 작품활동과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파블로 피카소와의 격동적인 스캔들,  특히 7명의 연인들 중 유일하게 그를 버리고 떠난 6번째 연인으로 더 유명했던 예술가였다.

질로의 딸 아우렐리아 엥겔은  모친이 폐와 심장에 질환이 생겨 마운트 시나이 웨스트 병원에 입원 중에 숨졌다고 AP통신에 알려왔다.

"어머니는 정말 극도로 재능이 많은 예술가였다.  우리는 앞으로 어머니의 유산과 훌륭한 회화 작품 등 우리에게 남긴 유작들을 평가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프랑소아즈 질로(1921년 11월 26일 생)는 파리의 부유층 출신으로 부모의 희망에 따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과 소르본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정공했던 법학도이지만 결국 화가가 되겠다고 대학을 중퇴했다.  본인은 똑똑하고 아름다웠고 1943년 질로가 21살 때 62세의 피카소와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피카소는 질로를 숭배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가정을 이루려면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아이를 낳자고도 했다. 아들 끌로드와 딸 팔로마가 태어났지만 둘의 지인인 주느비에브와 피카소가 관계를 가졌다. 질로는 이를 참지 못하고 피카소를 떠났다. 피카소의 다른 아내와 연인들과 달리 자기 발로 그를 떠난 유일한 여성이다.  피카소는 그녀가 떠날 때에도 질로를 사랑했다고 한다.

질로는 2016년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를 사랑했고 두 사람이 미술에 대한 놀라운 열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포로나 죄수가 아니었다"고 결별을 직접 설명한 적 있다.

당시 94세였던 질로는 " 나는 내 의지에 의해서,  독자적 결정으로 그를 떠났다.  나는 그 이전에도 파블로에게 '조심해. 나는 내가 오고 싶을 때 왔고 떠날 때에도 내가 가고 싶을 때 갈거니까'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피카소는 "나같은 남자를 떠날 사람은 절대로 없다"고 대답했고 질로는 "어디 두고 봅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질로는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가장 유명한 책은 1964년 칼턴 레이크에서 출간한 "피카소와의 삶"( Life with Picasso )이다.  화가 난 피카소는 책의 출판을 막으려고 여러 차례 소송을 제기했고 법정에서 질로를 맹공격했지만 세 차례 다 패소했다고 딸 엥겔은 말했다.  그는 66세로 건축가 경력을 가졌지만 지금은 모친의 작품과 자료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번 째 패소 후 피카소는 질로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인사를 했다.  그렇게 싸우면서도 자기와 비슷하게 배포가 크고 강력한 여성과 함께 했던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고 딸은 말했다.

[AP/뉴시스]프랑소와즈 질로의 1965년 12월 21일 이탈리아 밀라노 전시회.

[AP/뉴시스]프랑소와즈 질로의 1965년 12월 21일 이탈리아 밀라노 전시회. 

무남독녀로 태어난 질로는 다섯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화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부모의 희망에 따라 법학을 택하고 그림에 대한 열정은 감추고 살았다.  첫 전시회를 연 것은 1943년이다.

그 해에 세느강변의 한 레스토랑에 친구와 함께 갔다가 피카소와 당시 연인 도라 마르를 포함한 일행들과 조우했다.  질로는 그 날 가장 웃기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책에 썼다.  피카소가 "그렇게 생긴 여자(미인)들은 화가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두 어린 여성은 피카소의 화실에 초대를 받았고 질로와 피카소의 관계는 곧 시작되었다. 

1953년 피카소를 떠난 뒤 질로는 전 남자친구인 뤽 시몽과 재회해 1955년 결혼했다.  딸 엥겔을 낳은 뒤 1962년 이혼하고 미국의 세균학자로 소아마비 백신연구가로 유명한 조너스 솔크와 재혼해 캘리포니아와 파리를 오가면서 살았다.

1995년 그가 사망한 뒤 질로는 뉴욕으로 영구 이주했고 그 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질로의 미술 작품은 그 동안 가격이 계속 고공행진을 했다.  2021년에는 소더비 경매장에서 "기타를 든 팔로마"(1965년작)가 130만 달러에 낙찰될 정도였다.  그의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박물관과 뉴욕근대미술관을 비롯해 세계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카소와의 삶은 1996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피카소를 넘어 살아남기" ( Surviving Picasso )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피카소와의 생활은 매우 힘든 것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질로에게 부모의 부르조아적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전문 화가로서의 진정한 꿈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피카소와의 사랑도 무엇보다 미술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는 종류의 것이었다고 딸 엥겔은 말했다.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은 " 질로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노력하는 예술인이었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창조적인 작품을 위해 용감하게 실험을 하는 그의 정신이 모든 회화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는 평을 얻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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