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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야기⑤]'부정축재' 수난시대…박정희와의 만남

등록 2013.06.22 06:00:00수정 2016.12.28 07: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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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어머, 얘 봐라. 왜 이리 용돈을 함부로 써! 네가 돈병철인 줄 아니?”

 돈병철! 사람들은 이병철 회장에게 또 하나의 별명을 붙였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은 이병철 회장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줬다.

 이 회장은 또 1957년 4개의 시중은행 가운데 ‘한국흥업은행’과 ‘조흥은행’을 샀다. ‘호남비료’, ‘한국타이어’, ‘삼성시멘트’ 등의 주식도 사들여 대주주가 됐다. 한국 제일의 기업가가 된 것이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반부정·반정부 항쟁을 펼친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정부가 바뀌고 부정을 척결하겠다는 움직임 속에서 이병철 회장은 그만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부정 축재자’의 낙인이 찍혔다.

 “그동안 세금을 빼돌려 모은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삼성 산하의 열다섯 개 기업체가 모두 탈세를 했다는 혐의로 출두한 검찰의 취조실. 분위기는 험악하기만 했다.

 “글쎄요. 아직 계산해보지 못해 잘 모르겠습니다.”

 부장검사는 순간 묘한 웃음을 지었다. 보통은 그렇게 물으면 절대 아니라는 답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병철 회장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소. 그럼 다시 묻지요. 왜 탈세를 했습니까?”

 “우리나라는 경제 상황이 많이 변했는데도 전쟁 직후 세금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었던 세금 제도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꼼꼼하게 따져보면 법 자체가 잘못돼 있는데 그런 불합리한 세금 제도의 문제는 덮어놓고 기업하는 사람들을 부정 축재자로 몰아 벌을 주려고 하십니까? 처벌에 앞서서 세금 제도를 개정하는 일이 순서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나라에서는 돈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 세금을 많이 걷을 수 있는 세금 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세금 제도는 바뀌지 않았다. 1000환을 벌면 1200환을 세금으로 내는 경우도 있었다.

 “이래서는 누구도 기업을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탈세를 하는 걸 사장님도 알고 있었단 말이죠?”

 부장검사는 진술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은 속에서 뜨거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연합니다. 사장도 모르게 어떻게 탈세를 합니까?”

 정부는 삼성에게 추징금으로 50억 환을 내라고 했다.

 “이대로 가만히 계셔서는 안 됩니다. 그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나면 삼성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돈을 낸다는 건 우리가 잘못했다는 걸 시인하는 꼴입니다.”

 직원들이 더 울분을 토해냈다. 이병철 회장이라고 어떻게 분하지 않았을까. 그는 잠도 오지 않았다.

 ‘지난 12년 동안 어떻게 키워온 기업인가!’

 사실 당시 경제인들은 안팎으로 많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기업을 운영하는 일 외에도 비리 정치인에게서 뇌물을 요구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기업인들 중에도 분명히 그것을 기회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나름 소신과 원칙을 지켜가며 기업을 운영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다.  

 ‘시인하면 평생을 부정 축재자의 꼬리표가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잘못이 없으니 돈을 내지 못하겠다고 버티면 회사도 직원들도 모두 위태롭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삼성물산공사를 빼앗겼을 때를 떠올렸다. 사장인 그는 악덕 부르주아지(Bourgeoisie, 자본가 계급)로 내몰려 취조를 받고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 창고에 있던 물자들은 압수됐다. 간신히 가족들과 목숨을 건져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재기했다.

 그때도 지금도 날개를 달았는가 싶은 순간마다 날개를 꺾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치 상황에 따라 어제는 영웅이 되었다가 오늘은 죄인이 되고…. 경제란 정치에 휘둘릴 수밖에 없구나.’

 그는 숙고 끝에 추징금을 내기로 했다. 버티는 건 회사에 좋은 일이 아니었다. 또 나아가서는 국가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요구에 무리가 있더라도 따릅시다.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점매석하고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졸부가 된 사람도 있고, 은행 돈으로 쉽게 사업을 하여 기업은 파산 직전에 있으면서도 애국하는 기업가인 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기업과 달리 경제성과 경쟁력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으켜 운영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혼란한 시기에 쉽게 동요해 우리가 지켜온 큰 것을 잃어버리면 국가를 위하는 길이 아닙니다. 추징금을 냅시다.”

 거듭되는 회의 끝에 임원진을 설득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의 수난은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부정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운 군부는 다시 한 번 이병철 회장을 부정 축재자로 지목했다.

 그때 이병철 회장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이 답답했다. 조홍제 부사장이 붙들려갔다는 소식도 날아왔다. 나라 밖에서 편히 있는 자신 대신 고초를 당하고 있는 직원들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는 정변의 중심 세력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부정 축재자를 처벌한다는 혁명 정부의 방침 그 자체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과 국가 운영을 뒷받침해온 건실한 기업인은 엄격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들은 변칙적이고 불합리한 세금 제도 아래에서도 국가 경제를 다시 일으키는 데에 기여하면서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생활을 안정시키고 세금을 내왔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바는 오직 오늘날 혼란의 근본 원인이 국민들의 빈곤에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대안은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인을 처벌해서 경제 활동이 위축된다면 빈곤 추방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를 비롯한 많은 기업인들이 처벌받는 것을 모면하기 위한 궤변이 결코 아닙니다. 나는 전 재산을 헌납하는 한이 있어도 그것이 국민의 빈곤을 해결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편지 내용은 곧 신문에 공개됐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회장은 당시 박정희 부의장(5·16군사정변 후 대통령에 취임)을 처음으로 만났다.

【서울=뉴시스】1961년8월 삼성 이병철 회장이 전경련 회의 1차 임시총회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전경련)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61년8월 삼성 이병철 회장이 전경련 회의 1차 임시총회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전경련)  [email protected]

 그는 이병철 회장에게 부정 축재자로 지목된 11명의 처벌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이병철 회장은 자신이 가장 큰 부정 축재자로 거론된 마당에 그렇게 묻는 박정희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호흡을 가다듬고 소신껏 말했다.

 “부정 축재자로 지목된 기업인들은 사실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검은 안경을 쓰고 있어 박정희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예전에 탈세 혐의로 취조를 받을 때 했던 말을 다시 들려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모두 똑같은 조건하에서 기업을 운영했는데 재계 11위 안에 드는 사람만 부정 축재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12위 이하 기업들도 역량이나 노력, 기회가 없어서 11위 안에 들지 못했을 뿐이지 부정 축재를 했을 가능성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어떤 선을 그어 ‘죄가 있다, 없다’라고 하면 안 되지요.

 기업을 잘 운영해서 키워온 사람은 부정 축재자로 몰려 처벌 대상이 되고 원조 달러나 은행 융자를 받아서 낭비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한다면 자유 경제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부정 축재자 처벌에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기업가로서 제 의견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기업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탄압하면 경제 위축이 심해집니다. 또 세금이 줄어 나라 살림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기업인들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일을 도맡아 하도록 해주십시오. 기업인에게도 나라에도 이익이 될 것입니다.”

 “국민들이 과연 납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못마땅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아시다시피 저는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지 정치가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정치가가 알아서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다음에 다시 한 번 꼭 만납시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스물일곱 개 기업에 378억 800만 환을 벌과금으로 추징했다. 삼성은 103억 400만 환을 내야 했다. 삼성은 다시 한번 태풍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셈이었다. 그런데 정계는 이병철 회장에게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지난번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안했던 내용을 실현시키려면 정계와 경제계를 중재하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 역할을 좀 맡아주기 바랍니다.”

 “저는 공직에 맞지 않습니다.”

 거듭 사양했지만 경제계에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누군가가 나서 흩어져 있는 경제인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서울=뉴시스】1969년 제 6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삼성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사진=인생은 흐르는물처럼 '담담여수' 서적)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69년 제 6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삼성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사진=인생은 흐르는물처럼 '담담여수' 서적)  [email protected]

 주변 기업인들의 권유로 결국 이병철은 한국경제인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 공직이었다.

 1961년 8월, 한국경제인협회 회의장.

 “경제인 및 경제 각 부문 간의 연결을 도모하며 주요 산업의 개발과 국제 경제 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건전한 국민 경제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마이크 앞에 선 이병철 회장은 엄숙하게 정관을 읽어 내려갔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재계의 본산이라고 부르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이다. 회의장 안 회원들의 표정에는 기사회생에 대한 안도감, 국가에 대한 비장한 사명감 등이 뒤엉켜 있었다.

 창립 회원은 모두 12명. 부회장인 조성철 중앙산업 사장, 남궁련 해운공사 사장을 비롯해 이정림, 설경동, 박흥식, 홍재선, 최태섭, 이한원, 정재호, 김지태, 이양구, 함항희 등 기업인들이었다.

 한편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에게 얘기한 ‘경제인 활용안’은 그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투자 명령’으로 실현됐다. 박정희는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처음에는 부자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이병철 회장의 의견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투자 명령에 따라 한국경제인협회 회원들이 정유, 시멘트, 비료, 나일론, 합성수지, 전기 기기, 케이블 등의 공장을 짓기로 했다. 비료는 이병철, 정재호, 김지태가 맡았다. 정유는 남궁련, 이동준과 이정림이 제철, 케이블은 구인회, 시멘트는 김성곤, 전기는 이한원이 각각 맡았다.  

 당시 한국 경제 발전안을 두고 의견이 양분돼 있었다. 하나는 외자를 유치해서 공장을 하나라도 많이 세워 수입을 대체하고 수출을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인구의 대부분이 종사하는 농업을 개발한 후에 공업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병철 회장을 포함한 한국경제인협회 회원들은 나라의 기간산업(전력, 철강, 가스, 석유 산업 등 한 나라 산업의 기초가 되는 산업)을 견실하게 키우는 일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병철 회장은 기회만 닿으면 정부 관계자들에게 이 같은 생각을 말했다.

 이병철 회장은 대규모의 신규 투자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산업회장.

 이곳에는 세계 80여 개국에서 500여 명의 기업인들이 왔는데, 이병철 회장은 한국 경제인 대표로서 미국 정부 관계자 및 경제인들에게 한국의 경제 사정을 설명하고 정유와 비료 공장 건설을 위한 투자 유치를 이끌어내려 했다.

 또 다른 동료 경제인들이 자금이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그들을 해외 경제 단체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거물급 경제인들과 연결해줬다. 민간경제교섭단을 구성해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은 미국 쪽을 맡았다.

 덕분에 1962년부터는 그 사이 추가 회원을 영입해 마흔 명으로 늘어난 한국경제인협회가 명실상부한 경제인 단체로서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

 1963년에는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한국경제인협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떠올랐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이 본격적으로 국가 핵심 사업이 됐고, 그 중추적인 역할을 기업인들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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