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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70주년, 동부전선 펀치볼을 가다···'주인 없는 땅'

등록 2020.06.25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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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부 전선

중동부 전선

[양구=뉴시스] 한윤식 기자 = 6·25 전쟁, 어느덧 70년이라는 고희(古稀)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 땅 어느 곳이든 전쟁의 비참함이 서려 있는 치열한 격전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강원도 양구 지역을 빼놓을 수 없다.

양구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도솔산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백석산 전투,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을 꼽는다. 이들 6개 주요 전투를 ‘양구전투’라 부른다.

이 가운데 펀치볼 전투는 지지부진하던 전쟁의 양상을 바꾸고 대한민국과 강원도를 지켜낸 전투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1950년 6월25일, 불법 남침 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은 소련제 최신예 T-34 전차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낙동강 최후 방어선까지 진격했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극적으로 성공하자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말 압록강 유역까지 진격해 갔다.

양구 펀지볼 전투 전적비

양구 펀지볼 전투 전적비


하지만 갑작스러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국군과 유엔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1951년 1월4일에는 서울이 다시 적에게 점령됐다.

이후 전열을 정비한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에 나서 3월14일 서울을 재탈환했고, 5월 무렵에는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돼 한 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치열한 고지전이 전개됐다.

이처럼 전쟁이 장기화할 우려가 커지자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미국과 북한 간의 휴전 협상이 시작됐으나, 양측의 의견 차이로 협상은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결렬됐다.

그러자 유엔군 총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압박을 가해 협상을 강요하려는 전략을 세웠고, 미 제8군 사령관인 밴 플리트 중장은 7월21일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게 전략적 요충지인 양구의 해안분지(Punch Bowl) 일대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양구지역 대표적 전투 중 하나인 펀치볼 전투의 시작이다.

펀치볼

펀치볼


그러나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병력이 투입된 ‘피의 능선’ 전투에서는 인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마지막 전투장면의 배경이 되기도 한 ‘피의 능선’ 전투는 이름 그대로 아군과 적들의 피로 뒤덮인 지옥도 자체였다.

미 제10군단은 적의 병력증원을 차단하고 화력을 분산시켜 군단 전역으로 작전지역을 확대시키기 위해 1951년 8월29일 예비부대로 편성돼 있던 미 해병 제1사단에게 해안분지 북쪽 고지군 공격을 명령했다.

6·25동란 당시 미국의 종군기자가 ‘펀치’라는 음료를 담는 그릇(볼) 모양과 비슷해 펀치볼이라고 부르게 됐다.

여의도 면적의 6배가 넘는 해안분지의 평지는 작전 수행을 위한 병력과 물자의 집결이 가능했고, 이곳을 둘러싼 봉우리들은 양구를 거쳐 인제를 관통하거나 북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끼고 있었다. 고지에서 주변 일대의 적을 관측할 수 있고, 화력 유도가 용이해 피차간에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미 해병 제1사단은 당시 사단에 배속된 국군 해병 제1연대로 하여금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를 공격하게 했으며, 미 해병 제7연대에게는 펀치볼 동북쪽의 702고지와 660고지를 공격토록 했다.

1957년 4월 세워진 주민 이주비

1957년 4월 세워진 주민 이주비


8월31일 공격을 시작한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에 고전하던 중 국군에 처음으로 보급된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특공대가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는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적의 기관총과 수류탄에 의해 희생자가 속출해 공격 기세는 저하됐지만, 당시 5중대 1소대장인 손진천 소위의 용감한 행동이 기폭제가 돼 9월2일 ‘김일성 고지’인 924고지(현 을지OP)를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손진천 소위는 50여개의 수류탄 파편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고지를 점령하기 전에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불굴의 투혼으로 다시 일어나 중대원들을 독려,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미 해병 제1사단은 9월8일 다시 전방의 고지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 9월20일까지 펀치볼 전방 749고지와 812고지 등을 추가로 점령했다. 미 제10군단은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을 이겨내고 펀치볼 전체를 완전히 확보했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400여명의 전사자와 1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인민군 2799명을 사살하고 557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국군 해병 제1연대도 100여명의 전사자와 3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380여명의 인민군을 사살하고 40여명을 생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펀치볼 전투를 통해 중동부 전선에서 전력의 우위를 입증하면서 공산군에게 휴전 협상을 압박하는 정치적 효과도 함께 거두는 등 6·25의 양상을 바꿔 강원도의 중요 지역을 지켜낼 수 있었다.

치열한 전투로 수복한 펀치볼은 원주민 대부분이 북으로 피란한 상태였고, 전쟁이 끝나자 정부 주도로 1956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친 정책 이주로 재건촌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소유권과 경작권이 없던 이주민들은 원주민이 이북으로 넘어가 소유자 복구등록을 신청하지 못한 무주지, 즉 주인 없는 땅을 원천적으로 국유화할 수 없도록 한 법률 조항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주민들은 정부가 이주할 때 “일정 기간 경작하면 소유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며 2017년 7월 국민권익위원회에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집단 민원을 제기했다.

이후 지난해 5월 황영철 전 의원이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발의해 올해 1월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으로써 해안분지 일대의 ‘주인 없는 땅’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됐다.

이번에 개정된 법안으로 무주지에 대한 국유화가 가능해졌고, 취득한 국유재산은 경작민들에게 수의계약 방식으로 매각하거나 대부할 수도 있게 됐다. 무주지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인 토지 관리가 가능해졌을뿐만 아니라 무주지를 경작하는 해안면 주민들의 어려움과 각종 분쟁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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