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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섬, 제주]②제주 정원의 역사(中)

등록 2025.04.27 08: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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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사상가·외국 선교사, 제주에 다양한 정원품종 도입

일제강점기…관공서 정원 조성, 학교에서 전문가 양성

곤충학자인 석주명, 서귀포에 아열대 정원의 씨앗을 뿌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26일 오전 제주시 도남동 주택가. 구한말 박영효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적거지 터로 추정되고 있는데, 신축 건물이 들어서면서 흔적이 사라졌다. 2025.04.27.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26일 오전 제주시 도남동 주택가. 구한말 박영효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적거지 터로 추정되고 있는데, 신축 건물이 들어서면서 흔적이 사라졌다. 2025.04.27. [email protected]


정원은 누군가의 손길로 다듬어진 공간이자, 자연과 함께 빚어낸 경관이다. 치유와 휴식을 제공하면서 생태계를 품는 그릇, 그리고 이웃과 소통하는 마당이 된다. 제주는 정원을 꾸미기에 이상적인 땅이다. 따뜻한 해양성 기후, 화산섬 특유의 토양, 사계절 변화에 따라 피고 지는 수많은 식물들. 그리고 돌과 바람, 물이 빚어낸 독특한 풍경까지 정원을 이루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섬 곳곳에 담긴 정원을 통해 '제주형 정원(J-가든)'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시리즈로 게재한다.<편집자 주>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조선시대 대표적인 과수정원인 감귤과원은 고종31년(1893년) 진상제도가 폐지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진상이 사라지자 감귤과원은 황폐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감귤을 생산하느라 겪어야했던 고충에서 벗어났고, 감귤을 생산하더라도 직접적인 소득과 연결되지 않으면서 민가에서 감귤을 재배할 이유가 없었다.

민가 주변에 병귤, 당유자, 진귤, 청귤, 동정귤 등을 비롯해 변이되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품종 등 수 그루 정도만 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박영효, 근대 제주정원의 효시

그러다 일본 온주감귤 품종을 들여온 인물이 개화파이자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1862-1939)다.

그는 고종 황제의 양위를 막으려다 친일파에 의해 1907년 감금형을 받고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조천에서 잠시 생활하다 제주성 남쪽 독짓골로 불리는 구남동에 땅을 매입하고 과수원을 일궜다.

이 때 심은 것이 일본에서 들여온 감귤나무다. 제주 정원역사로 볼 때는 감귤재배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이 감, 배, 비파, 석류 등 과수와 함께 고구마, 감자, 양배추, 양파, 토마토, 무, 당근 등 다양한 특수작물을 심은 점이다.

[제주=뉴시스]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박영효가 과수원에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장면을 챗GPT에서 그림 이미지로 생성했다. photo@newsis.com

[제주=뉴시스]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박영효가 과수원에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장면을 챗GPT에서 그림 이미지로 생성했다. [email protected]

그는 2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20년 이상 망명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과수, 채소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온난하고 강수량이 많은 제주의 기후풍토를 고려해 일반농사보다 특수작물이 더 적합할 것으로 판단하고 과수·채소정원을 일군 것으로 보인다.

재배에 성공한 작물에 대해서는 제주사람들에게 적극 권장했고, 새로운 작물이 뿌리내린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황성신문에서도 박영효가 과수원을 개간했다고 기록했는데, 감귤과 여러 작물을 재배한 과수원에 대한 시각적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제주시 이도주공아파트단지가 그 터다.

박영효는 1년의 유배기간이 끝난 후에도 2년을 더 머물다 1910년 6월 제주를 떠났다.

박영효는 제주에 머물 당시 1907년 설립한 중등교육기관인 사립제주의신학교에도 자금을 보태는 등 근대학교설립에 적극적이었는데, 정원과 관련한 중요한 사실이 학교에서 나온다.

근대학교 사진에 정원 모습 담겨

제주도교육청이 발간한 제주교육사에 보면 '1907년 오현단 구내에 건립된 사립의신학교'라는 설명과 함께 이 학교의 사진이 실렸다.

[제주=뉴시스] ‘1907년 오현단 구내에 건립된 사립의신학교’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 학교 건물 주변과 진입로에 수목으로 정원을 조성했다. 출처는 제주도교육청에서 발간한 제주교육사.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제주=뉴시스] ‘1907년 오현단 구내에 건립된 사립의신학교’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 학교 건물 주변과 진입로에 수목으로 정원을 조성했다. 출처는 제주도교육청에서 발간한 제주교육사.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학교 건물 주변과 진입로에 수목으로 정원을 조성한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개혁사상으로 무장했던 박영효의 영향인지는 알 길이 없다.

사진이 촬영된 시기가 1907년인지, 아니면 1910년 사립제주의신학교를 인수하고 설립된 공립제주농림학교 때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학교 정원의 모습을 담은 귀중한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박영효는 1909년 제주의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 설립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신성100년사(1909~2009)'에 따르면 신성여학교 설립자인 라쿠르(Marcel Lacrouts·한국명 구마슬) 신부는 1909년 9월 뮈텔 주교에게 보내 편지에서 "관대한 한 분의 자발적인 협력 덕분에 제주에 여학교 설립의 가능성은 더 이상 공상이 아닙니다"는 내용을 보냈다. '관대한 한 분'은 다름 아닌 박영효였다.

이 신성여학교의 1910년대 사진에서도 정원의 모습을 포착했다. 서양인 선교사로 보이는 인물 2명이 교사(지금의 향사당) 문 앞에 앉아서 여학생의 활동을 바라보는 장면인데, 정면에 여러 식물을 심은 정원이 확연하다.

사진이 흐릿한 탓에 어떤 식물인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초본과 목본류를 심었고 돌로 경계를 하면서 화단정원을 조성한 것이다. 일부는 꽃이 피어있는 장면도 확인된다.

또 다른 자료사진으로는 페네(Peynet) 신부가 1899년 매입한 첫 성당이자 사제관으로 지금의 천주교 제주교구청, 제주중앙성당이 시작된 유서깊은 곳이라는 설명이 달렸다.

[제주=뉴시스] 왼쪽은 페네 신부가 건물을 매입하고 설립한 성당으로 지금의 천주교 제주교구청, 제주중앙성당이 시작된 곳이다. 오른쪽은 제주 최초의 여학교인 신성여학교 모습이다. 2장 모두 정원을 만든 장면이 확연하다. 출처는 신성학원에서 발간한 '사진으로 본 신성 100년'.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제주=뉴시스] 왼쪽은 페네 신부가 건물을 매입하고 설립한 성당으로 지금의 천주교 제주교구청, 제주중앙성당이 시작된 곳이다. 오른쪽은 제주 최초의 여학교인 신성여학교 모습이다. 2장 모두 정원을 만든 장면이 확연하다. 출처는 신성학원에서 발간한 '사진으로 본 신성 100년'.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이 사진에서도 꽃이 핀 초본식물과 상록수로 보이는 목본류가 함께 조성된 정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은 다른 책자인 '사진으로 엮은 제주교육 100년'에 1909년으로 기재되고 있어서 정확한 촬영시기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이 3장의 사진이 제주에서 근대 정원의 초기 기록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감귤과원이 대부분이었던 제주의 정원은 구한말 개혁사상가, 선교사 등이 다양한 품종의 식물을 도입하면서 근대 정원의 시작을 알렸다.

일제강점기 공적 정원 조성·교육 활발, 분재용 자원수탈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 정원은 공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관공서 건물에 수목 등으로 정원을 꾸미는 것이 관행처럼 이뤄졌다.

1920년대 제주도립의원을 보면 건물 주변에 나무를 심고 깔끔하게 관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23년 설립된 제주측후소 역시 관사 앞에 암석 등과 함께 정원을 조성했다.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소나무, 용설란 등으로 정원수를 심는 사실을 여러 사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제주=뉴시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관공서 사진이다. 왼쪽은 제주도립의원이고 오른쪽은 제주측후소이다. 건물 주변에 정원을 조성했다. 출처는 '제주도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제주=뉴시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관공서 사진이다. 왼쪽은 제주도립의원이고 오른쪽은 제주측후소이다. 건물 주변에 정원을 조성했다. 출처는 '제주도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일제강점기 학교에서 정원사(원예사)를 양성하는 역할을 했다. 1910년 사립제주의신학교를 인수해서 개교한 공립제주농림학교가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교육청 제주교육사에 따르면 이 학교의 1920년대 교과목인 농업분야에 작물, 원예, 토양, 비료, 조림 등이 포함됐다. 학교 실습장 등을 통해 작물, 원예에 대한 수업을 하면서 정원관련 인력을 양성했다.

1928년에 실습지로 '특용작물포 전답 500평, 보통 작물포 266평, 소채원 1314평, 상원(桑園) 3600평, 과수원 300평, 과수 및 화훼 묘포 50평' 등을 갖췄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정원관련 교육적 진전이 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여러 곳에 신사가 세워졌고, 참배를 강요당했는데 신사 주변에 정원이 조성된 장면도 확인할 수 있다. 사원정원의 형태인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인들이 분재 정원을 만들기 위해 한라산 자생 식물을 수탈한 사례도 있다.

조선총독부 1921년 5월13일 관보에 따르면 한라산국유림에서 진백(眞柏·눈향나무) 310그루를 정원목·분재 용도로 일본인에게 매각허가를 했다. 1921년 9월8일자 관보에도 일본인에게 한라산국유림의 주목 50그루, 눈향나무 30그루를 매각하는 내용이 실렸다.

한라산 고지대에 자라는 눈향나무 등 희귀자원이 일본인 분재용도로 인기를 끌었고, 그만큼 상당량이 훼손된 것이다.

석주명, 서귀포 정원의 씨앗

일제강점기가 끝날 무렵 제주의 정원역사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이 세계적인 곤충학자이자 '나비박사'로 유명한 석주명(1908-1950)이다.

1943년 4월24일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현 서귀포시 토평동)이 문을 열었다. 7만2000㎡규모로 약용식물과 아열대식물을 시험 재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석주명은 이 제주도시험장 개장과 함께 책임자로 부임했다. 1945년 5월까지 2년1개월동안 제주의 나비, 곤충, 방언, 민속 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약용·아열대 식물도 길렀다.

약용식물로는 디기탈리스, 목향, 피마자 등을 재배했고 아열대식물로는 비파, 무화과, 올리브나무를 심었다. 시험장 주변에는 동백나무 수백그루를 식재했다. 석주명의 손에 의해 서귀포지역 약용정원, 아열대정원의 씨앗이 싹튼 셈이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석주명이 책임자로 근무했던 서귀포시 토평동 옛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시험장 건물. 지난 19일 오후 현장에서는 건물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주변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동백나무, 육계나무 등이 울창하다. 2025.04.27.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석주명이 책임자로 근무했던 서귀포시 토평동 옛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시험장 건물. 지난 19일 오후 현장에서는 건물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주변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동백나무, 육계나무 등이 울창하다. 2025.04.27. [email protected]


제주시험장은 일제 패망이후 국가로 귀속됐고, 현재 제주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제주시험장 건물은 2017년부터 제주도로 소유가 전환됐으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전되고 있어서 2020년 6월24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85호로 지정됐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는 관광서와 학교에서 공적 기능의 정원조성과 함께 실습장을 통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면서 정원이 대중 속으로 퍼져나갈 기반을 형성했다.

*이 기사는 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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