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馬이야기] 제주마, 천년이 넘는 시간을 달리다
등록 2026.07.30 08:00:00
탐라 유적과 삼성신화에서 확인된 말 존재
"말은 제주로"라지만 "말은 육지로"가 실상
중국 원나라 탐라목장 거쳐 조선 국마장으로 이어져
온화한 기후와 초원이 키운 국내 최대 말 생산지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26일 제주시 용강동 제주마 방목지에서 천연기념물인 제주마 110여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영주십경의 하나인 '고수목마'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2026.07.30. ijy788@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7/29/NISI20260729_0002199519_web.jpg?rnd=20260729233159)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26일 제주시 용강동 제주마 방목지에서 천연기념물인 제주마 110여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영주십경의 하나인 '고수목마'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2026.07.30. [email protected]
제주는 오랜 세월 '말의 고장'’으로 불려왔다. 제주마는 섬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제주인의 삶과 함께해 왔다. 농경과 운송, 군사와 교통의 수단이었던 말은 마을 공동체의 생활문화와 풍속, 지명과 언어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시대가 바뀌면서 말의 역할과 사육 환경이 달라졌다. 제주마는 이제 역사적 유산을 넘어 생물자원과 문화콘텐츠, 승마·관광·교육산업을 연결하는 자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제주인의 삶 속에 이어져 온 말문화와 제주마의 생태적·산업적 가치를 조명하면서 보존과 활용 현장을 찾아 제주마와 말문화 유산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한다.<편집자주>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26일 한라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5·16도로변 제주마 방목지에 들어서자 숲을 배경으로 천연기념물 제347호 ‘제주의 제주마’ 110여 마리가 머리를 숙인 채 풀을 뜯고 있었다. 올해 태어난 망아지들은 어미 곁을 맴돌며 가볍게 깡충거렸다. 전망대에 모인 관광객들은 초원을 거니는 말 떼를 바라보며 ‘말의 본고장’ 제주를 실감했다.
바람을 맞으며 숲과 초원을 오가는 말 떼는 제주가 예부터 자랑한 영주십경 가운데 ‘고수목마(古藪牧馬)’를 떠올리게 한다. 제주마 방목지는 옛 목축경관을 간직한 공간이자 제주 말문화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전하는 현장이다.
“말은 제주로"가 아닌 "말은 육지로"
제주도와 한국마사회 통계에 따르면 이는 전국 2만7165마리의 54.8%로 국내에서 기르는 말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 이상이 제주에 있는 셈이다. 특히 국내 경주마의 91% 정도가 제주에서 생산·공급한 말이다. 산업구조와 말의 쓰임은 변하고 있지만 제주가 국내 최대 말 사육지역이라는 위상은 이어지고 있다.
제주가 말 사육에 적합한 곳임을 빗댄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전해지지만 실제 상황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태어난 말을 제주로 보내 기른 사례도 있었지만 제주에서 생산한 말을 육지로 보내는 것이 대체적인 일이었다.
제주에서 자란 말은 고려의 수도 개경과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향했다. 왕실의 어승마, 군대의 전마, 관리들이 타는 승용마, 역참과 수송에 투입할 역마가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말을 생산하고 선별해 바다 건너 중앙으로 보내는 일은 수백 년 동안 반복됐다.
제주 말 사육, 유구한 역사
제주시 용담동 유적에서는 말의 모습을 표현한 토기가 나왔고, 7∼9세기 생활유적인 곽지패총에서는 말뼈가 출토됐다. 곽지유적의 말뼈는 수량이 적고 머리 부분에 집중돼 있어 식용보다는 운송이나 다른 목적에 말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런 자료를 종합하면 탐라는 적어도 통일신라시대 무렵 또는 그 이전부터 말을 기르거나 이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주=뉴시스] 제주시 용담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에 그려진 말 모습. (사진=국립제주박물관 자료에서 캡처) photo@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7/29/NISI20260729_0002199522_web.jpg?rnd=20260729233434)
[제주=뉴시스] 제주시 용담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에 그려진 말 모습. (사진=국립제주박물관 자료에서 캡처) [email protected]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은 "일부 공개 자료를 보면 월령리 한들굴에서 말의 치아가 출토됐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다"며 "1986년 제주대학교박물관 제주도유적 보고서를 보면 한들굴에서 동물뼈가 나왔다는 기록은 있지만 말의 치아로 특정한 내용은 없다"고 밝혔다.
김 원장은 말 사육과 관련해 "2021년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에서 삼국시대 백제의 과하마(果下馬)와 탐라의 관련성을 검토한 내용이나 기존 고고학 자료 등을 감안하면 아주 오래전부터 말을 기른 것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말을 길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은 고려사 탐라현에 등장하는 '삼성신화(三姓神話)'에 있다. 양·고·부을나로 불리는 세 신인이 배필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상자를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와 송아지들과 오곡의 종자가 나왔다'는 기록과 '처음으로 오곡을 파종하고 또 가축을 길러 나날이 부유하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고기(古記)를 인용해서 썼다.
망아지가 송아지와 오곡의 종자와 함께 등장한다는 점은 말이 일찍부터 생업과 재산, 공동체의 성장을 떠받치는 중요한 자원으로 기억됐음을 상징한다. 삼성신화는 말이 단순한 가축을 넘어 탐라의 형성과 생활문화에 깊이 연결된 존재였다는 집단적 기억을 전하는 문화적 기록으로 읽을 수 있다.
고려시대에 탐라의 말 공식 등장
고종 45년인 1258년에는 제주가 공납한 말을 문무 4품 이상 관리들에게 나눠줬고, 원종 원년인 1260년에도 제주에서 바친 말을 고위 관리들에게 내렸다. 충렬왕 14년인 1288년 기록은 여러 섬에서 말을 방목해 왕실과 관료들에게 나눠줬는데 그중 탐라에서 나온 말이 많았다고 전한다.
탐라의 말 사육은 중국 원나라가 탐라목장을 설치하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1273년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한 뒤 원은 탐라를 직할지로 삼았다. 이어 1276년 탐라에 말 160필과 전문 목축인을 보냈다. 이들은 현재 성산읍 수산리 일대인 수산평에 목장을 설치했다. 이듬해에는 제주 서부 차귀평에도 목장을 두고 동아막과 서아막으로 나눠 관리했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원나라가 탐라에 목장을 처음 조성한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 (사진=뉴시스DB) ijy788@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7/29/NISI20260729_0002199523_web.jpg?rnd=20260729233602)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원나라가 탐라에 목장을 처음 조성한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 (사진=뉴시스DB) [email protected]
원은 탐라목장을 제국이 운영한 14개 황실목장 가운데 하나로 편성했다. 일본 정벌에 필요한 군마를 확보하고, 동중국해의 전략적 거점인 탐라를 장기간 지배하려는 목적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로써 기존에 탐라 사람들이 말 사육은 원의 통치 아래 대규모 목장 체계로 재편됐다.
원에서 온 목축 전문가들은 말 떼를 일정한 규모로 나눠 관리하고, 소유관계를 구분하기 위해 낙인을 찍었다. 전마로 사용할 수말은 거세해 힘과 온순함을 갖추게 했으며, 계절에 따라 풀이 풍부한 곳으로 이동했다. 겨울에는 아막 부근에서 미리 마련한 건초를 먹이는 방법도 활용했다.
낙인, 거세, 말 조련과 무리 관리 등 전문기술이 확산되면서 탐라 말 사육은 생산 규모와 관리 수준을 함께 높였다. 원의 목장은 말을 처음 들여온 출발점이 아니라 기존의 탐라 목축을 조직화하고 전문화한 전환점이었다.
따뜻한 겨울과 풍부한 풀, 천연의 목장
한라산 자락은 해안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봄에는 낮은 지대에서 먼저 풀이 돋고 점차 높은 곳으로 번진다. 가을에는 높은 지대의 풀이 먼저 시들고 낮은 곳의 풀이 뒤늦게 마른다. 목자들은 계절과 목초 상태에 따라 말 떼를 위아래로 이동시키며 먹이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천과 깊은 골짜기는 말의 이동을 제한하는 자연 울타리 역할을 했다. 곳곳에 솟은 오름은 겨울철의 거센 바람을 막고 장의 위치와 경계를 정하는 지형적 기준이 됐다. 섬이라는 공간도 말의 이탈과 외부 가축의 유입을 통제하는 데 유리했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 동부지역 중산간과 해안 풍경. (사진=뉴시스DB) ijy788@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7/29/NISI20260729_0002199524_web.jpg?rnd=20260729233702)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 동부지역 중산간과 해안 풍경. (사진=뉴시스DB) [email protected]
제주의 중산간 초원은 자연조건으로 만들어진 풍경이 아니다. 목장을 넓히기 위한 화입과 벌채, 지속적인 방목이 숲의 천이를 억제하면서 넓은 초지가 형성되고 유지됐다. 자연환경과 인간의 목축 활동이 오랜 시간 함께 만든 문화경관이다.
탐라의 명마와 고려의 공마, 원의 황실목장, 조선의 국마장으로 이어진 역사는 제주를 국가 말 생산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중산간 초원과 잣성, 목장길이 생겼고 말을 돌보는 테우리, 목장을 관리하는 감목관이 등장했다. 말 진상은 제주 사람들에게 무거운 부담이었지만 오랜 세월 축적한 사육과 조련 경험은 제주만의 독특한 목축문화를 형성했다.
김영준 제주도 농축산식품국장은 "오늘날 초원을 거니는 제주마는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며 "탐라에서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 천년이 넘는 세월을 품은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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