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끌어내린 자리에 러시아 등진 코사크 지도자…젤렌스키 동상 제안
등록 2026.07.30 16:42:22수정 2026.07.30 18:48:25
푸시킨·불가코프 기념물도 철거…전쟁 속 역사 되찾기
박물관장은 “찬반 이분법은 단순화”…설치 장소에도 이견

【카르키프(우크라이나) =AP/뉴시스】28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 카르키프의 중앙광장에 서있는 우크라이나 최대의 레닌 동상이 반러시아 운동가들에 의해 철거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30일(현지시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제안을 계기로 키이우에서 역사적 인물을 공공 공간에서 어떻게 기릴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키이우 타라스 셰우첸코 대로의 레닌상 좌대는 2013년 12월 마이단 시위대가 동상을 쓰러뜨린 뒤 12년 넘게 비어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키이우 페체르스크 라우라 수도원에 설치된 마제파 흉상을 공개하면서 빈 좌대에는 별도의 대형 기념물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는 “레닌이 쓰러진 곳에 마제파가 우뚝 설 것”이라며 러시아가 수세기 동안 마제파를 배신자로 묘사해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의 시각으로 자국 역사를 보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마제파는 1687년부터 1709년까지 코사크 헤트만국을 이끈 군사·정치 지도자다. 오랫동안 차르 표트르 1세와 협력했으나, 표트르 1세가 헤트만국을 방어해 달라는 마제파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1708년 스웨덴 국왕 칼 12세와 동맹해 러시아에 맞섰다. 이듬해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패하면서 마제파의 시도도 좌절됐다.
마제파는 러시아에서는 배신자의 상징으로, 현대 우크라이나에서는 모스크바의 지배에 맞서 자치와 주권을 지키려 한 인물로 엇갈리게 평가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라우라의 흉상 설치와 옛 레닌상 자리에 새 기념물을 세우자는 제안을 “역사적 불의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마제파 복권은 우크라이나가 추진해 온 역사 재편 작업의 한 부분이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한 뒤 소련 시대 기념물을 철거하고 거리 이름을 바꾸는 ‘탈공산화’를 추진했다. 이 작업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강제 병합과 돈바스 전쟁 이후 속도가 붙었고, 2022년 전면 침공 뒤 더욱 빨라졌다.
역사 재평가는 마제파에 그치지 않는다. 크름타타르계 작가이자 활동가인 알림 알리예우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와 이름을 되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 지배에 저항한 우크라이나 시인이자 인권운동가 바실 스투스의 초상을 새 지폐에 넣기로 한 일과 전국에서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동상을 철거한 일을 이러한 변화의 사례로 들었다. 우크라이나 중앙은행은 오는 9월 4일 스투스의 초상이 들어간 새 지폐를 발행할 예정이다. 알리예우는 푸시킨이 서사시 《바흐치사라이의 분수》에서 크름타타르인을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이국적인 존재로 묘사했다고 비판했다.
러시아 문화인 기념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둘러싼 논쟁은 키이우 출신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동상으로도 이어졌다. 키이우 시 당국은 지난 6월 안드리이우스키 우즈비즈 거리에 있는 불가코프의 옛집 앞에서 2007년부터 자리를 지킨 동상을 철거했다. 불가코프의 의과대학 재학 사실을 알리던 기념판 등도 철거됐지만 옛집에 마련된 불가코프 박물관은 계속 운영되고 있다. 동상은 파손되지 않은 채 포장돼 작고한 조각가 미콜라 라파이의 유족에게 반환됐으며, 유족은 이를 공공장소에 다시 내놓지 않고 보존하기로 했다.
![[워싱턴=AP/뉴시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운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8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연방 의사당에서 열리는 고(故)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의 '러시아·이란 제재법' 초당파 지도부 회의에 도착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오전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비공개로 회담하기도 했다. 2026.07.29.](https://img1.newsis.com/2026/07/29/NISI20260729_0001463211_web.jpg?rnd=20260729082544)
[워싱턴=AP/뉴시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운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8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연방 의사당에서 열리는 고(故)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의 '러시아·이란 제재법' 초당파 지도부 회의에 도착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오전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비공개로 회담하기도 했다. 2026.07.29.
하비아누리 관장은 러시아의 침공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졌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어를 쓰고 러시아 영화를 보는데 러시아인들이 나를 죽이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루빨리 우크라이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정체성의 압박에도 하비아누리 관장은 역사적 인물을 찬반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단순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레닌상 철거에는 찬성하고 마제파도 중요한 인물로 평가했지만, 옛 레닌상 좌대에 마제파 기념물을 세우는 데에는 반대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옛 레닌상 좌대가 있던 곳에서 사람들을 교수형에 처했다고 설명했다.
논쟁의 출발점이 된 마제파 흉상은 페체르스크 라우라에 설치돼 있다. 라우라에는 마제파가 바로크 양식 개축을 후원한 성모안식 대성당도 있다. 이 성당은 지난 6월 15일 러시아의 키이우 공격 당시 지붕이 크게 파손되고 불이 났다. 유네스코는 성당이 직접적이고 중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확인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 드론이 수도원 일대를 타격했다고 밝혔다.
옛 레닌상 좌대에 마제파 기념물을 세우자는 방안은 아직 공식 승인되지 않았다. 반면 라우라의 마제파 흉상은 이미 공개됐다. 전면 침공 이후 영국에 거주해 온 우크라이나인 올레나 폴리슈크는 라우라를 방문해 “마제파가 기념되는 것이 기쁘다”며 “그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일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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