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묻은 이빨, 그 땅엔 지뢰도 있었다…박광수 '흰 우유의 어둠'
등록 2026.11.05 15:29:08
철원의 유년 기억과 분단의 상흔, 회화로 재구성
화려한 숲에 스민 인간의 고독…변화의 기로 선 작가
학고재 개인전서 신작 회화 21점…12월 5일까지

유치와 땅굴 Milk Tooth and Tunnel, 2026, Oil on canvas, 65.1x80.3c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울창한 숲속 거대한 나무 밑동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다. 손끝에는 하얀 이빨 하나가 보인다. 어린 시절 땅에 묻었던 유치(乳齒)를 다시 찾는 장면이다.
작은 이빨을 묻었던 구멍은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커졌다. 박광수의 그림 '유치와 땅굴'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출발점인 강원도 철원의 땅에는 또 다른 것이 묻혀 있다. 지뢰다.
철원에서 태어나 자란 박광수(42)는 1990년대 중반의 한 장면을 기억한다. 큰 홍수가 난 뒤 학교에서 담임교사가 유인물을 나눠줬다. 유실된 지뢰로 의심되는 물체를 발견하면 만지지 말고 군부대나 경찰에 신고하라는 안내였다.
어린 시절에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기이한 기억이었다.
박광수는 5일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흰 우유의 어둠' 기자간담회에서 당시에는 너무 익숙해 의식하지 못했던 기억들을 작업하면서 새롭게 발견했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박광수 작가가 5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흰 우유의 어둠'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앞에 서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린 시절 철원에서 경험한 풍경과 기억을 바탕으로 제작한 회화 21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12월 5일까지. 2026.11.05.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6/11/05/NISI20261105_0002284134_web.jpg?rnd=20261105150306)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박광수 작가가 5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흰 우유의 어둠'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앞에 서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린 시절 철원에서 경험한 풍경과 기억을 바탕으로 제작한 회화 21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12월 5일까지. 2026.11.0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그의 기억에는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여름날 평상에 앉아 옥수수를 먹으며 지뢰 지대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던 순간이다.
"그 땅 어딘가에는 나의 유치가 묻혀 있고, 발견되지 않은 지뢰가 묻혀 있다."
작가노트에 적힌 이 문장은 이번 전시의 출발점이다. 어린 시절 빠진 이빨과 전쟁의 잔재인 지뢰. 평범한 일상과 죽음의 위험이 같은 땅에 존재했다.
박광수는 이빨과 지뢰, 옥수수를 연결해 현실에는 없는 풍경을 만들어냈다. '옥수수밭'에서는 옥수수 알갱이가 치아를 닮았고, 땅에 묻힌 유치는 식물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지뢰와 이빨 Landmines and Teeth, 2026, Oil on canvas, 45.5x53cm *재판매 및 DB 금지
5일 개막한 개인전 '흰 우유의 어둠'은 이처럼 사라진 존재를 향한 '그리움'을 회화로 풀어낸 전시다. 신작 회화 21점을 선보인다.
전시장에는 원색의 숲이 펼쳐진다. 붉고 노란 나뭇가지가 뒤엉키고, 청록색 풀숲 사이로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눈 덮인 숲에는 주황빛 나무가 솟아 있고, 땅과 사람의 몸이 하나로 이어진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불안하다. 숲속에 누운 사람들은 잠든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하늘에 뇌가 떠오르고, 신체가 대지의 일부로 변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 낯선 풍경의 출발점은 철원이다. 박광수는 사람이 어린 시절 살아온 장소에서 고유한 공간감을 체득한다고 설명했다. 탁 트인 평야와 산세, 한탄강 일대의 지형은 그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것은 철원의 실제 풍경이 아니다. 기억에 상상을 덧입혀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그림을 만드는 과정도 이와 닮았다. 선을 긋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물감을 올렸다가 문지르거나 긁어낸다. 여러 겹의 흔적이 쌓이면서 나무와 사람, 땅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진다.

무당거미 Joro Spider, 2026, Oil on canvas, 130.3x162.2cm *재판매 및 DB 금지

모든 하늘 All the Skies, 2026, Oil on canvas, 90.9x72.7cm *재판매 및 DB 금지
2023년 학고재 개인전 '구리와 손'에서 현란한 골법용필로 선의 에너지를 분출했다면, 이번에는 빽빽한 선 사이로 인간의 존재가 부각된다. 누군가는 숲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누군가는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인물의 몸은 덤불과 뒤엉켜 풍경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화려한 색채와 무성한 생명력 속에서도 인물들은 고독하다. 이전의 폭발적인 선의 에너지는 누그러졌지만, 그 자리에 인간의 고뇌가 스며들었다. 화면은 깊어졌지만 선의 긴장감은 한결 느슨해졌다.
전시 제목 '흰 우유의 어둠'은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 '대지와 휴식의 몽상'(1948)에서 착안했다. 새하얀 우유의 표면 아래에도 어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이다.
박광수는 자신의 작업을 어두운 숲속을 더듬어 가는 길에 비유한다. 눈부신 색채로 가득한 숲에서 인물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익숙한 선의 힘을 넘어 새로운 회화의 길을 모색하는 작가 역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그 숲에는 40대에 접어든 예술가의 고민과 고독이 배어 있다.
전시는 12월 5일까지 관람은 무료.

박광수, 높이 Height, 2026, Oil on canvas, 90.9x72.7cm *재판매 및 DB 금지

박광수, 백색 물질 White Matter, 2026, Oil on canvas, 130.3x193.9cm *재판매 및 DB 금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