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광부간첩 27년만에 명예회복 이병규씨 “너무나 억울했다”

【태백=뉴시스】홍춘봉 기자 =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으로 탄광촌 소요를 주동한 간첩으로 몰렸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다. 27년만에 누명을 벗게 되어 다행이지만 철저하게 망가진 몸과 마음은 어떻게 해야할지 참담하다”. 강원 태백시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채탄부로 근무하다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 했던 이병규(64)씨는 국내 최초 광부간첩조작사건을 지난 26일 법원 판결문을 보여 주며 설명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지난 1985년 6월 22일 강원 태백시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채탄부로 근무하던 이병규(64)씨는 보안사령부 수사관에 의해 강제 연행되면서 인생이 짓이겨졌다. 국내 최초의 광부간첩사건은 보안사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던 전두환 정권이었기에 가능했다.
이씨는 “보안대 수사관은 고문 받다가 죽어 동해안 물고기가 되어도 쥐도 새도 모른다”면서 “장성광업소 소요사태 주동자로 인정하면 살려 주고 가족도 돌봐주겠다”고 무자비한 고문을 일삼던 당시를 회상하며 치를 떨었다.
그는 “국가 공권력에 의해 간첩이 되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명예는 회복했지만 지난 수십년 피해를 당한 당사자와 가족들의 피해구제는 너무 어설프다”며 “지난 세월은 악몽의 나날들”이라고 토로했다.
다음은 이씨와 일문일답.
-왜 광부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됐나.
“1985년 3월 초 장성광업소에서 3일간 유혈충돌을 일으킬 정도의 파업사태가 발생했다. 파업이 발생하자 나는 과거 납북어부 전력 때문에 집에서 소요가 가라앉을 때까지 두문불출했다. 당시 어느 누구도 접촉하지 않았는데 사건을 마무리한 뒤 보안사가 납북어부 전력을 알고 간첩에 의한 소요사태로 작업을 했다. 무려 37일간 영장도 없이 체포 구금되어 밤낮 없는 고문과 폭행으로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가족과 동료들도 강릉보안대로 연행된 사실을 알지 못했고 나중에는 동료 7, 8명도 끌려와 1주일간 고초를 겪다가 간첩행위 진술서를 쓰고 석방된 것을 알았다.
알몸이 된 나의 손목과 발목에 수갑을 채우고 그 사이에 군용 곡괭이 자루를 끼워 책상 중간에 올려놓고 통닭구이 고문이 매일 이어졌다. 얼굴에 타월을 씌우고 커다란 주전자에 고춧가루 탄 물을 들이 부으며 간첩혐의를 인정하라는 고문을 받다가 10여 차례 실신했다. 죽으려고 혀를 깨물고 보안대 지하실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했다. 세상과 단절된 상황에서 그런 공포와 전율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수개월간의 협박과 고문이 이어지면서 간첩혐의로 검찰에 송치됐고 당시 검찰과 법원도 나의 무죄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간첩으로 만들었다.“
-1985년 장성광업소사태는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나?
“노조지부장이 직선으로 당선된 뒤 다시 선거를 치르는데 직선으로 어렵게 되자 지부장 선거를 몰래 간선으로 바꿔 실시했다. 그것도 조합원들이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지부장 선거를 실시하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탈락하자 수년째 쌓였던 분노가 폭발했다. 광업소장의 강압적인 노무관리와 겹치면서 부녀자들이 더 반발했다. 수천명의 경찰 병력이 출동하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태수습을 위해 도지사와 도경국장이 다녀갈 정도였다. 자연발생적인 시위를 보안사가 100% 조작해 내가 이 사태를 배후 조종한 것으로 만들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진실을 밝히고 무죄를 입증하는데 어려움을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 고문과 폭행의 후유증으로 기억력이 많이 퇴색했고 증인과 증거들도 찾기가 어려웠다. 특히 고문과 간첩 조작의 당사자들을 만나기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틀림 없는 사실은 간첩이 아닌데 간첩으로 몰린 사실, 국가 공권력의 횡포와 권력남용, 명백한 피해사실, 뒤늦게 진실을 증언해준 직장 동료와 이웃, 최소한의 자료 등이 있어 진실을 규명할 수 있었다고 본다. 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부단한 노력도 국내 최초 광부간첩 사건이 조작이라는 점을 밝혀낸 점이 결정적이었다. 항상 진실이 밝혀진다는 진리를 믿고 기다렸다.”
-최근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것으로 알고 있다.
“변호사의 자문을 거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그러나 나에게 3억7000만원과 부인 2억원, 모친과 아들 딸 등 직계가족, 친척, 동료 등에게 10억95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돈으로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는 없지만 이건 아니라는 판단에 변호사와 협의해 항소했다. 다른 납북어부 간첩과의 형평성 등을 고려하면 보상금이 턱없이 낮다는 것이 변호사의 지적이다. 지금도 고문후유증에 시달리고 가족들도 아직 간첩의 멍에로 인해 입은 피해가 가시지 않고 있는데 이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보안사 불법 구금과 교도소 수감생활 가운데 지금도 잊지 못하는 당시 상황이 있는가?
“보안사에서는 37일간 폭행과 고문은 물론 포승줄로 묶거나 지하실에 알몸으로 가두는 것은 일상이었다. 검찰에 송치된 뒤에도 자살을 예방한다며 손을 뒤로 묶고 수갑을 채운 뒤 포승줄로 온 몸을 묶어 수십일간 짐승 이하 생활을 해야 했다. 밤에 잠을 잘 때도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도 식사를 할 때도 혁수정을 풀어주지 않아 짐승 같은 날이 계속 됐다. 간첩이라고 협조해주면 가족에게 서민아파트도 마련해 주고 부인의 직장도 마련해 주겠다고 했지만 석방되어 보니 모두가 거짓이었다. 지난 수십년의 세월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지옥이고 불행의 최전방이었다.”
-앞으로 계획은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피해보상을 받고 나처럼 납북되었다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아직도 누명을 벗지 못한 사람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주고 싶다. 이제 자녀(2남1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우리 부부는 화천군 간동면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집을 장만했다. 앞으로 1, 2년 내 억울한 광부간첩사건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 내고 싶다. 이제는 공권력에 의해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개인이 생기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준 동료와 이웃들에게도 감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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