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아이즈]신동립의 잡기노트-숨겨진 명량해전 일등공신…기생 '어란'을 기리다
“이덕열이 아뢰기를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아 권준의 공으로 삼으면서 원균과 상의하지도 않고 먼저 장계한 것입니다. 그때 왜선 안에서 여인을 얻어 사실을 탐지하고는 곧장 장계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인 선조 30년 ‘조선왕조실록’ 1월27일자 기록이다.
이후 409년이 흐른 2006년 여름, 박승룡(86)옹은 사와무라 하치만다로의 유고집을 구했다. 조선총독부 순사 출신인 사와무라는 해남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죽어 해남 땅에 뼈를 묻고 싶다고 썼다. 사와무라는 명량해전의 일등공신으로 ‘어란’을 지목했다. 난중일기와 실록이 ‘이름 모를 어떤 이’, ‘김해 사람’, ‘여인’으로 표기한 바로 그 인물이다. 관기인 어란은 간첩이기도 했다. 적장의 기밀을 빼내 조선 수군에게 넘겼다.
왜장 스가 마사가게가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9월16일 전사하자 어란은 인근 벽파진의 절벽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옹은 “스가와 어란은 정을 통하는 관계였다. 어란은 스가가 누설한 군사 기밀, 즉 왜군의 출발일시를 이순신의 수군에게 전달했다. 덕분에 조선군은 대승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어란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순신은 바다에 대나무 새끼 2본을 깔았다. 이어 배 2, 3척으로 왜군의 선도선 수척을 유도한 다음 후방 연안에 숨겨둔 작은 배 수척에 지초(芝草)를 가득 싣고 왜군 함대의 뒤를 따르게 했다. 왜군은 명량해의 격류를 탔지만 대나무 새끼에 발목을 잡혔다. 우왕좌왕하는 왜군을 불을 붙인 지초선들이 덮쳤고, 적군은 섬멸됐다. 이순신의 배 13척, 왜군의 배는 133척이었다.
박옹은 “어란은 분명 애국을 했지만 애인을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으로 그날 밤 산발한 채 명량해협이 바라보이는 바다에 투신했다. 다음날 어부가 어란의 시체를 수습해 소나무 밑에 묻었고 마을사람들은 그 영을 위로하기 위해 석등롱을 세워 매일 밤 점화했다”고 전했다.
박옹은 어란이 몸을 던진 낭떠러지인 여낭터에 올해 초 표지비와 함께 어란상을 세웠다. 비용은 뜻밖에도 일제강점기 해남 태생 일본인들인 고니시 유이치로(71) 형제가 댔다. 이들의 부친은 송지면 어란리 심상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외조부는 어란리 최초의 김 양식자다. 형제는 “한·일 간의 사실(史實)을 놓고 심혈를 경주하는 데에 대한 축의금으로 제공한 것이지, 희사금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했다.
역사서가 누락한 어란을 6년에 걸쳐 발굴, 실체를 확인한 박옹은 “정유재란 416년이 지난 시점에 양국은 어란을 매개로 작은 화해를 이루기에 이르렀다”고 특기했다.
‘매봉(梅峰)에 초승달이 떠오른다. 울돌목 격랑 소리 들리는 가매섬에 어란의 노래가 메아리치네. 끓어 오른 분노일랑 바다 위에 던져 놓고 임의 입맞춤은 오직 조국뿐 불타는 정열 의로운 그 혼 어이 헛되랴, 어이 헛되랴. 흐르는 바닷물은 길이길이 흐르나니 파도치는 물결 위에 아! 청순한 난의 향기 흘러라 흘러라 빨갛게 떠 흘러라. 달마의 모종(暮鐘) 소리 은은도 한데 임을 향한 찬송은 온누리 흔드네.’ (어란찬가, 박승룡 어란보존현창회장)
팩트에 픽션을 보탠 팩션은 세계적 추세다. 팩션의 바탕인 역사연구 조류는 미시가 대세다. 이것들로 쓴 책, 즉 눈에 확 들어오는 콘텐츠는 발표 즉시 영상물로 둔갑하는 오늘이다. 박옹 덕분에 한국은 드라마틱한 역사 변이자원을 하나 더 보유하게 됐다.
문화부장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349호(10월28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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