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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월환, 전쟁영웅 해군 임병래·홍시욱 선정

등록 2014.08.31 12:08:32수정 2016.12.28 13: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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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국가보훈처는 9월의 독립운동가에 나월환 선생을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2014.08.31.(사진 = 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국가보훈처는 9월의 독립운동가에 나월환 선생을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2014.08.31.(사진 = 국가보훈처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김훈기 기자 = 국가보훈처는 9월의 독립운동가에 나월환 선생을, 해군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를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1912년 10월14일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나월환 선생은 상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 헌병학교 및 군관학교 교수를 거쳐 중국군 헌병장교로 복무했다.

 1939년 11월에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참여한 인사들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해 일본군 점령지역 내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선전·심리전을 전개했다. 중국군민을 대상으로 한 연극공연으로 한·중 공동 항일 유대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선생은 일부 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1년 1월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을 이끌고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합류해 초모·선전·첩보·유격전을 전개했다. 특히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반일사상을 고취시켜 한인청년을 모아 광복군의 인적토대를 확충했다.

 또한 한국청년훈련반을 운영해 모집된 한인청년을 정예병사로 훈련시킨 결과 공작대 결성 당시 28명이던 대원수를 1940년 말 100여 명으로 늘렸다. 그러나 전지공작대의 광복군 편입 과정에서 생긴 대원들과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선생은 1942년 3월1일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뜻을 기려 9월24일 오후 2시에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연다. 9월 한 달간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기획사진을 전시한다.

  ◇인천상륙작전 비밀 지킨 해군 임병래 중위·홍시욱 하사

 6.25전쟁 당시 낙동강 지구까지 밀린 전세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대한민국 해군첩보부대의 헌신적인 활약이 있었다.

 그 주역인 임병래 중위는 1922년 평안남도 용강 출생으로 1941년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4월20일 해군 중위로 임관했다. 해군정보국 창설 당시부터 창설요원으로 많은 활동을 했으며 영흥도 첩보전 조장이었다.

【서울=뉴시스】국가보훈처는 9월의 6·25전쟁영웅에 해군 임병래(사진 왼쪽) 중위와 홍시욱 하사를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2014.08.31.(사진 = 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국가보훈처는 9월의 6·25전쟁영웅에 해군 임병래(사진 왼쪽) 중위와 홍시욱 하사를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2014.08.31.(사진 = 국가보훈처 제공)  [email protected]

 홍시욱 하사는 1929년 출생으로 1948년 6월1일 해군의 신병 10기로 입대 후 인천상륙 작전의 첩보대원으로 참여해 임무를 완수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영흥도 첩보전' 일명 엑스레이(X-RAY) 작전에서 해군정보국 첩보대는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에 잠입해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병력배치 상황, 주둔 병력의 규모와 해안방어태세 등을 파악하는 작업을 했다.

 인천상륙작전 디데이(D-day)가 임박해 영흥도 첩보기지는 철수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미군이 상륙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로 기습해왔고, 임병래 중위를 비롯한 해군 첩보대원 9명과 해군 의용대원 30여 명은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적에게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다른 대원들이 보트로 탈출할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공격을 차단했다. 하지만 두 대원은 끝내 탈출에 실패해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포로가 될 경우 아군의 작전이 탄로 날 것으로 판단한 두 대원은 적을 쓰러뜨린 다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장렬한 죽음을 택했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1950년 9월14일이었다. 작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군사기밀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3년 7월 6일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했다. 우리 정부는 1954년 1월4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해 전공을 높이 평가했다.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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