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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도 기득권 유지한 춘천 출신 친일파 5명

등록 2016.08.15 18:14:39수정 2016.12.28 17: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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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임영주 기자 = 경술국치일인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및 관계자들이 지난 2009년 11월 8일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어플리케이션(앱)으로 만들어 시연회를 열고 있다. 모바일 친일인명사전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지름길로 대대적인 홍보에 들어갔다.    dasee@newsis.com

【춘천=뉴시스】김경목 기자 = 친일파들은 해방 후 일제강점기 시절의 경력을 디딤돌 삼아 경찰국장, 국회의원, 고위직 관료, 고위직 군인, 변호사, 종교계 대표, 대학 부총장, 교수, 기업인 등을 지내며 기득권을 유지했다.

 해방 후 기득권을 유지한 강원 출신 친일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6명에 달한다. 이 중 춘천 출신은 5명이나 됐다.

 이들 친일파의 행적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서 발췌해 소개한다.

 ◇홍순일(홍순직) = 홍순일(洪淳稷)은 해방 후 홍순직(洪淳一)으로 개명했다. 만주국군 중위를 지낸 박정희(朴正熙)와는 동서지간이다. 1910년 12월10일 태어나 1930년 3월 강원도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해 1932년 3월 수료했고, 다음 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해 1935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이 고등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대동학원에 입학해 1935년 10월 제1부 제4기로 졸업했다.

 이후 만주국 치안부 마정국 사무관으로 근무 중이던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인 신징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전체임원회의에서 평의원으로 선임됐다. 만주국 협화회는 1932년 7월 일본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 아래 민족협화의 기치를 내걸고 '만주국의 건국정신을 구현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적·교화적·정치적 실천단체'를 표방하며 만들어졌다.

 각지에 분회를 조직하여 만주국 지배체제 안으로 민중을 끌어들여 항일운동에 대한 내부교란과 파괴공작, 선전선무공작을 수행하는 한편 전시동원조직의 역할을 담당했다. 1941년 7월 만주국 국제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42년 관제 개정으로 마정국이 치안부에서 흥농부 산하로 소속이 변경되면서 만주국 흥농부 마정국 사무관을 지냈다.

 해방 후 1946년 3월 미군정청에 의해 강원도 경찰국 소방과장에 임명됐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인 1949년 5월 서기관에 임명돼 교통부 비서실 기획과장을 지냈다. 1949년 7월부터 1950년 3월까지 감사관에 임명돼 교통부 비서실 감사과장을 지냈다. 1950년 8월 6·25 전쟁 중에 납북됐다.

 ◇이근수(李瑾洙) = 1889년 1월18일 출생한 그는 1907년 사립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1913년 3월 춘천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 3월 강원도 울진군수로 승진해 고등관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양구군수, 평강군수, 인제군수를 역임하고 1935년 8월 정7위로 승서되었고, 10월에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1928년 11월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과 1932년 10월 조선쇼와 5년 국제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6년 3월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39년 6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8월 강원도 고성군 장전공립보통학교에서 일제의 중국 침략과 관련해 시국인식을 철저히 할 것을 강조하는 강연을 했다. 1938년 제19회 중추원 회의의 자문사항 중 하나인 내선일체 정신을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에서 실천·구현하는 방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장기 전시 태세와 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내선일치, 황국신민으로서의 태도를 공고히 다지고 모두 일치단결하여 황도의 선양에 힘쓰는 것은 반도 거주자의 영원한 행복임을 강조하면서 육군 특별지원병과 개정 조선교육령이 실시됨으로써 징병과 의무교육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내선일체가 크게 약진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다고 표현했다.

 따라서 이 기회를 맞이해 관민이 하나 되어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방책으로 명사를 각 지방에 파견하여 일본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를 고찰하는 강연회를 개최할 것, 정신적 합병을 꾀하는 최고의 수단인 일본어의 보급을 강조할 것, 일본인과 조선인의 결혼을 장려할 것, 두 민족 동화의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유적을 보호할 것, 소학교의 내선공학을 장려할 것, 어려울 때 스스로 전시체제에 협력할 수 있는 시국인식을 철저히 할 것 등을 제시했다.

 해방 직후 강원도 농상부 식량과장을 지내다가 1945년 12월 해임됐다.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소환됐다. 1950년 3월7일 사망했다.

 ◇임용준(林龍俊) = 1899년 9월15일 출생. 호는 죽천(竹泉). 춘천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8월 보통시험에 합격해 이듬해 강원도 내무부 지방과에서 판임관 견습을 마친 뒤 1923년 강원도 인제군 속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평강군 속으로 재직 중이던 1932년 10월 조선쇼와 5년 국제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7년 3월 군수로 승진해 화천군수로 부임했다. 재직 중 화천군농회 회장을 맡았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수품 공출, 군사 후원과 징발, 국방휼병 헌금 모금 등의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한 공로가 인정되어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1943년 7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4년 3월 강원도 원주군수로 옮겨 재직하다가 1945년 7월 퇴직했다.

 해방 후 강원도 산림과장과 광공과장을 역임했다. 1950년 3월 강원도 노동조정위원회 위원에 위촉됐다. 1951년 9월부터 1952년 3월 서기관으로 춘천우체국장을 지냈다. 이후 춘천공업주식회사 사장, 강원기업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56년 5월 자유당 소속으로 춘천시에서 강원도 도회의원에 선출됐다. 이후  강원도의회 의장을 맡았다.

 ◇황태근(黃泰根) = 1889년 5월12일 출생. 1912년 4월 조선총독부 순사보로 임용돼 6월부터 강원도 춘천경찰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19년 12월 독립군자금 모금 혐의로 춘천경찰서에 검거된 김민수, 이동화, 홍종숙 등을 신문할 때 통역을 담당했다. 철원경찰서에 재직하던 1932년 10월 조선쇼와 5년 국제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5년 8월 강원도 강릉경찰서 경부로 발령받았고, 그해 10월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1936년 3월 조선인으로서 두 번째로 경찰서장에 임명되어 강원도 화천경찰서 서장으로 부임했다. 1936년 4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8년 5월 종7위에 서위되었다. 1939년 2월 강원도 평창경찰서 서장으로 발령받았다. 그해 3월 고등관 7등의 경시로 승진하면서 경상남도 경찰부 경무과 경시 겸 순사교습소 소장으로 부임해 1940년 10월까지 재직했다. 1940년 1월 훈7등 서보장을 받았다.

 화천과 평창에서 경찰서 경부로 재직 중 중일전쟁과 관련한 동원 소집, 군수품 공출, 국방사상 보급 선전, 유언비어 취체 검거 등의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해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해방 후 1946년 3월 미군정청에 의해 강원도경찰국 경찰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황항근(黃恒根) = 1895년 3월10일 출생. 호는 취당(翠堂). 1913년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4월 강원도 농업기수에 임명됐다. 1917년 5월부터 강원도 통천군 판임관 견습을 지내다가 1918년 6월 통천군 서기에 임명됐다. 1932년 10월 조선쇼와 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5년 6월 고등관 7등의 군수로 승진해 강원도 정선군수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던 1937년 12월 강원도 각 군에 조직되었던 청년단을 비상시국 극복과 연락통일을 도모할 목적으로 강원도연합청년단으로 통합할 때 평의원을 맡았다. 1940년 3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정선·횡성군수로 재직할 당시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수품 공출과 징발, 국방사상 보급 선전, 국방헌금 모금 등과 같은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해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1938년 1월 횡성군수로 옮겨 재직하다가 1941년 8월 퇴직했다. 이후 1942년 강원식산주식회사 철원지점장을 지냈다.

 해방 후 군경후원회 강원도지부장, 강원도선거위원장, 강원흥업주식회사 사장, 흥국기업주식회사 사장, 강원도 축산동업조합연합회 회장, 유도회(儒道會) 강원도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자유당 강원도 재정부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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