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살이에도 금수저·흙수저?···권력에 따라 대접 천차만별
등록 2017.07.19 08:44:41

한국국학진흥원이 웹진 담談 7월호 주제로 귀양(歸養)을 다뤄 눈길을 끌고 있다. 사진은 한국국학진흥원 전경. (사진= 뉴시스DB 2017.06.28)
압송자 없이 혼자서 이동, 모든 비용은 죄인 몫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국정농단 주동자들에 대한 재판이 한창인 가운데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웹진 담談 7월호 주제로 귀양(歸養)을 소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19일 경북 안동시 소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귀양(歸養)은 유배(流配)와 같은 뜻이다. 관리들이 죄를 지을 경우 죄인을 변방이나 외딴섬으로 보내 살게 하던 형벌이다.
귀양은 귀향(歸鄕)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귀향은 당시 죄를 지은 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형벌로서의 의미가 퇴색됐다.
조선시대 귀양은 중국 대명류의 오형(五刑) 체계인 '태장도유사(笞杖徒流死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의 5가지 형벌 가운데 하나로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인 유형(流刑)이다.
이 때 죄의 크기에 따라 등급이 나뉘고 장형이 따랐다. 고려시대와는 달리 형벌의 적용이나 유배지역에 대해서 신분 구별이 없었다.
유배지가 정해지는 과정은 죄가 무거울수록 유배지까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유배지가 결정되면 죄인은 스스로 알아서 유배지까지 이동해야 했다.
유배지는 대부분 외진 곳에 있었기에 먼 거리까지 걸어가거나 말을 사서 타고 가거나 유배인이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모든 비용을 국가가 지불하는 최근의 형벌제도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유배길까지 죄인을 압송하는 책임자로서 압송관이 결정되지만 압송관이 죄인을 포승줄에 묶은 채로 압송하는 것이 아니라 압송자와 죄인은 따로 출발했다. 유배경로 중간에 있는 역점에서 만나 귀양길을 잘 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정도였다.
더욱이 압송관이 유배길에서 필요한 물품도 유배인이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다. 압송관 중에는 무리한 금품 요구를 하며 무례히 구는 폐단도 허다했다.
유배인의 배경과 권세에 따라 유배경로에서 겪게 되는 상황도 천차만별이었다. 관직 복귀 가능성이 높은 유배인이 귀양을 가는 경우 유배경로지의 수령과 동료 관료들이 각종 물품과 금전, 향응을 제공했다.
경종 때 '윤양래'는 너무 많은 금품을 제공받아 말이 그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쓰러지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반면, 복귀 가능성이 낮은 관료나 관직이 없는 유배인은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고통스러운 귀양길을 떠나야 했다.
순조 대의 '심노숭'은 유배 노정과 유배지에서 사용할 금전 27냥을 마련해 유배지로 떠났다. 이 돈으로 유배 노정에서 말을 빌리고 숙식을 해결했다. 작별인사를 나온 친척과 지인들에게 소소한 물품을 지원받는 등 노자를 아끼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마침내 유배지에 도착했지만 압송관이 예상치 못했던 노잣돈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압송관은 말이라도 팔아서 지급하라며 무례히 굴자 심노숭은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어려운 금전사정을 토로하였지만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2냥을 지급한다.
유배지에 도착한 이후의 생활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재력이 있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유배인의 경우 상황은 매우 달랐다.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 '이항복'은 병마절도사로부터 집과 노비들까지 제공받았다. 유배인들은 본가에서 보내온 돈으로 집을 구입하거나 지을 수도 있었다. 살림살이도 평소의 일상과 같이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정약용'과 같은 명망있는 학자들이 유배를 오는 경우 오히려 자제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여겨 서당을 여는 등 환대를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대접을 받는 유배인은 극소수였다. 대부분 귀양다리(유배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로서의 서러운 삶을 살아가야 했다. 특히 유배지가 된 고을에서는 유배인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유배인을 군식구로 취급하게 마련이었다.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은 고을의 경우 지역민과의 마찰과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하게 되면 관에서는 유배인을 감시하고, 그에게 숙식을 제공할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지정해 주게 된다. 혹독한 보수주인을 만나게 되면 유배인들은 굶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정조 때 주색잡기로 국고를 탕진해 추자도로 유배 간 '안조환'은 보수주인을 정하기 위해 관원과 함께 집집마다 돌아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억지로 정해진 보수주인집이 방 한 칸이었기에 안조환은 처마 밑에 자리 한 장을 깔고 궁박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누더기가 된 옷 한 벌로 4계절을 나고, 거친 음식을 먹거나 굶주리기도 하면서 비참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결국 조롱받으며 동냥을 하는 신세가 됐다. 밥값이라도 하려고 새끼줄을 꼬아 짚신도 만들고 돗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귀양길에서 겪게 되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소소한 삶의 모습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귀양을 떠난 양반들이 직접 써내려간 일기류에서 찾을 수 있다.
천준아 웹진 담談 7월호 편집장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국정농단의 장본인들이 속속 법정에 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잠시나마 세상과 격리돼 감옥이라는 유배지에서 새로이 다시 태어났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이번 7월호 주제를 '귀양'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