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적산법화원에 울려퍼지는 신라인의 노래

엔닌의 기록에 의하면, 적산법화원 법회에 참석한 스님, 속인,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신라 사람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신라인은 당나라 사람과 상대적인 말일 뿐 실상은 산동 일대 신라인의 복잡한 혈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통일신라 당시 중국 동부해안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신라인들은 독립된 방(防)과 촌(村)을 이루고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누리면서 중국 동부의 해상권과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삼국 중 가장 늦게 이곳으로 이주한 신라인들은 대부분 골품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입당하여 웅지를 펴려고 하거나 당나라와의 조공무역에서 비롯된 사무역의 발달로 인한 상인층이었다. 그 중에는 장보고나 이원좌 같이 권력 핵심부의 인물도 다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백제 멸망(660) 후 당에 강제 이주된 유민과 고구려와 발해 유민 또한 상당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69년에도 3만8300호(戶)의 고구려인이 강회(江淮)의 남쪽과 산남(山南), 경서(京西), 제주(諸州) 등지에 이주됐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장보고가 세력을 잡기 이전에는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李正己)일가가 반세기 동안 이 일대를 지배해왔다. 그러므로 엔닌은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왕국에 대해서도 일부 적고 있다.
엔닌이 적산촌에 머물고 있을 때 가까운 청산포에 발해의 무역선이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적산에 신라관과 더불어 발해관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는 여행 중 장안으로부터 귀국 중이던 발해의 왕자 일행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엔닌의 연구로 저명한 미국 하버드대 교수였던 에드윈 라이샤워 박사는 그의 저서 ‘엔닌의 당대 중국여행’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본의 견당사 일행이 중국에 타고 간 선박에는 신라인 통역들이 탑승해 항해상의 안내라든가 중국 관헌과의 접촉을 주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역관계로 일본에 체류한 신라인 등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에 있었던 다수의 신라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세세한 기록을 남긴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은 청익승(請益僧)으로 선발돼 서기 838년 6월13일 견당사선(遣唐使船)을 타고 하카타만(지금의 규슈 후쿠오카)을 출발해 7월2일 양자강 하구에 도착하여 9년에 이르는 구법여행을 했다. 출항한지 1년 뒤인 839년 그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서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게 되자 적산법화원에서 그해 겨울을 나면서 이곳에서의 신라인들의 생활을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적산법화원에는 승려 24, 사미니3, 노파(老婆)2명이 상주했으며 연(年)500석을 수확하는 장전(庄田)도 경작되었으며 사원은 장영(張詠), 임대사(林大使), 왕훈(王訓) 등 3인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이곳의 신라인들은 당시 불교 탄압이 극심한 상황에서 잠입해 있던 엔닌을 숨겨 주었을 뿐 아니라 신분을 보증하게 해 준 공험(公驗)을 취득하게 하는 등 엔닌의 구법활동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엔닌은 귀국한 뒤에도 적산법화원의 은혜를 잊지 못해 일본 교토(京都)의 고야산(高野山)에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우기까지 했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산법화원의 불교의식과 범패에 관한 기록은 제2권 중 839년 11월16일 법화경 강을 시작으로 22일 이후의 강경(講經)의식, 이어지는 일일강의식과 송경의식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강경의식이란, 당대(唐代)에 널리 행해지던 의식으로 고승(高僧)이 경전을 설하고 이에 대해 승려와 대중이 문답을 주고받는 의식이다. 이 과정에 경전을 설하는 대덕 스님이 경전의 제목을 노래하기도 하고, 부처님의 법을 찬탄하는 노래를 승려와 대중이 주고받으며 노래하기도 하고, 불단(佛壇)을 돌며 신도들이 꽃을 뿌리는 산화의식(散花儀式)도 행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 어떤 승려는 독창으로 당풍(唐風)의 범패를 유창하게 노래하였고, 대중들은 신라풍으로 노래했다고 엔닌스님이 적고 있었으니 바로 이 대목이 필자로 하여금 장보고의 뱃길을 따라 흐르는 갖가지 문헌과 자료들을 찾아 수년을 헤메게 했던 것이다.
이들 기록은 비록 작은 분량이지만 신라뿐 아니라 당대의 불교의식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기록 속에 있는 의식과 음악은 현재 한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의식이 대부분이고 의식음악인 범패의 모습도 너무도 달라서 한국의 범패로는 전혀 산동 신라인의 범패를 추정해 볼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의식과 노래들이 중국과 대만에 있음을 알았으니 그에 관한 얘기는 대만편에서 마저 쓰기로 한다.
아무튼 신라인들에 의해 행해졌던 불교의식과 일반 신도들이 부르던 찬불가들이 왜 지금은 사라져 버렸을까?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사찰에서 피아노 반주에 찬송가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산중으로 숨어든 사찰 여건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8천(八淺)의 하나로 승려가 꼽혔고, 그리하여 승려는 도성출입도 할 수 없었던 조선 후기의 상황을 볼 때 신라적 찬불가가 이 땅에 남아있을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인들이 불렀던 신라풍의 범패는 어떠했을까? 미루어 짐작컨대 신라의 향가와 유사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은 신라의 향가가 가사만 남아있고 노래의 흔적이 없으니 이마저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신라인의 소리 찾기를 포기할소냐? 호박 속에 담긴 한 방울 공룡의 핏자국이 쥬라기공원이 되듯이 이 세상 어디엔가 신라인의 소리 한 방울이 숨어있을 것이다. 찾아 헤메던 끝에 지난해 ‘신라의 소리 영남범패’라는 대담집을 펴내기도 했지만 아직 이 핏방울이 신라의 소리가 되려면 발로, 손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그려내야 할 숙제들이 가득하다.
작곡가·음악인류학 박사 http://cafe.daum.net/ysh3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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