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에게 물었다,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윗날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연중에 가윗날, 즉 추석만한 명절이 없다는 얘기다. 예로부터 우리는 추석을 민족 대명절로 삼고 온갖 큰 행사를 벌여왔다. 우리처럼 농경 민족에게는 수확만큼 큰 보람이 어디 있을까. 곡식과 햇과일로 풍성하게 차린 차례 상을 조상님께 올리며 1년 동안의 보살핌에 감사드리는 마음은 동양 3국 중 가히 최고라 하겠다.
그러나 요즘 추석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모 기관에서 설문 조사한 결과, 추석선물로 가장 받고 싶은 선물 1위가 ‘현금’이라 한다. 또 벌초 역시 대행업체가 해주는 곳이 많아 인터넷으로 간단히 벌초 사진만 확인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차례 음식도 마찬가지. 까다롭고 번거로운 장보기로 고생했던 주부들을 위해서 최근에는 차례음식 장보기부터 차례 상 차리기까지 대신 해주는 대행업체까지 생겼다는데….
그럼에도 꿋꿋하게 추석 차례 상과 제사상을 지키는 음식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것은 바로 조(棗), 율(栗), 시(柹) 즉 대추, 밤, 감이다. 물론 이 세 가지를 올리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 특히 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세대 주부들은 음복(飮福)을 생각해 아이들 입맛에 맞는 바나나, 망고, 키위 같은 외국 과일들로 이들을 대체하고 있기까지 한다. 그러니 슬슬 걱정이 앞선다. 다른 건 몰라도 조, 율, 시만큼은 차례 상에 꼭 올려야 하는 필수품목이기 때문이다.
우선 셋 중 으뜸인 조(棗)부터 말하자면, 예부터 대추나무는 벼락 맞은 것을 일품으로 쳤다. 아마도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부적 삼아 갖고 다니는 사람들도 꽤 될 것이다. 요즘엔 핸드폰 줄 장식으로도 팔릴 정도로 벼락 맞은 대추나무의 영험은 대단하다.
과일 같으면서 약으로도 쓰인다. 벌레가 잘 먹지 않아 나무부터가 면역성과 내성이 아주 강하다. 따라서 ‘자식’을 상징하는 의미로도 종종 쓰여 왔다. 폐백을 할 때 대추를 던지며 “자식 많이 낳고 잘 살아라”는 덕담을 하는 것 역시 대추의 속뜻에서 비롯된 것. “손(孫)을 끊지 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대추는 영혼적인 면이 강하다. 꼭 혈육으로 자식을 낳으란 뜻보다도 대대로 이어오는 조상의 정신을 기리라는 의미에서 오랜 세월 제사상에 올려졌다.
이와 함께 상에 올려지는 밤(栗)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다른 식물의 씨앗은 본 형태를 잃으면서 새싹을 돋는데 반해 밤은 새싹이 돋아도 밤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산으로 밤을 따러 간 적이 있다. “정말 밤나무가 뿌리에 밤톨을 그대로 보존한 채, 나무기둥이 올라간 것인가”라는 의문에 살짝 밤나무뿌리 쪽을 파보았더니, 웬걸. 거기에는 역시 밤톨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딱딱한 밤톨 위에 큰 기둥을 세우는 밤나무처럼, 우리의 원형인 조상을 한 시도 잊지 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던 것이다.
때문에 과거 장례식 때 사람의 시신이 없을 경우, 밤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 관에 넣은 것 역시 이런 원형 보존의 정신을 담은 게 아닌가 싶다. 뿐만 아니라 밤은 부모의 사랑을 새삼 일깨워 준다. 단단한 가시와 나무껍질을 제거한 뒤에도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여 쉽게 먹을 수 없는 밤처럼,부모님의 사랑 역시 매서운 회초리와 엄한 꾸중 속에 참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필수품목인 감(柹). 상에 올려지는 것은 대부분 홍시다. 만약 홍시가 없을 경우엔 곶감으로 대체해 상에 올린다. 왜 그럴까. 알다시피 감의 씨는 아무리 잘 심어도 감이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만 3년이 지난 뒤, 접을 붙여야 감이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도 접을 붙이는 고통을 겪고, 또 접을 붙이듯 교육을 받아야 참 인간이 된다고 해서 감을 상에 올린 것이다.
이만큼 조, 율, 시 세 가지는 그 의미가 깊어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다. 먹을 것 하나, 입을 것 하나에도 꼼꼼히 그 의미를 부여한 선조들의 지혜를 되살려 이번 추석에는 부디 가족끼리, 형제끼리 싸우지들 마시라. 두둥실 떠오르는 둥근달 바라보며 즐겁게 보내길 기원한다.
고유의 명절 추석이 다가오면 예년만은 못해도 전통재래시장에는 제법 활기가 돈다. 그리고 이 맘 때가 되면, 나는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다. “법사님, 저는 미국에 사는데, 차례나 제사 때가 되면 영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큰 형님께서 지내시긴 하지만, 제가 미국에서 차례 상을 따로 올리면 안 되겠습니까?” 혹은 “삼촌께서 지내시긴 하지만, 저희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우리 쪽에서 지내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제사를 두 번 지내거나, 다른 곳에서 지내는 것을 피하는 것이 맞다. 때문에 제사를 따로 모시고 싶어도 선뜻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삼혼칠백(三魂七魄)이라 해서, 영가는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법도에 따를 것이라면 위대한 영웅들은 나라에서도 제사를 모시는데, 그렇다면 영가는 나라 제사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가문의 제사로 가시겠습니까? 영가는 어디에든 다 가실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개념을 우리 인간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과거에는 대가족 중심의 농본주의 사회였고 유교 사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집안의 제사를 모시는 제주는 한마디로 제사장과 같은 권위가 있었다. 제사를 한 곳에서 지내는 것은, 바로 제사상을 중심으로 가문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달라졌다. 형제들이 이민을 간 경우도 허다하고, 자녀 역시 아들 없이 딸만 둔 곳도 많다. 굳이 이런 법도를 따라 제사를 한 곳에서만 지내야 하겠는가. 물론 한 곳에서 지낸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은 없겠으나, 그럴만한 상황이 안 된다면 따로 지내도 영혼 세계에서는 이해 못할 일도 아닌 것이다.
언젠가의 일이다. 40대 중반의 남성이 구명시식을 청했다. 이유인 즉, 원래 제사는 큰 형이 모셔야 하는데, 종교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는 바람에 문제가 됐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집안에 이런저런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사를 지내지 않아 그런 것 같습니다만, 형님께서 도통 제사 지낼 생각을 안 하시니….”
그동안 제삿밥을 드시지 못하셨을 부모를 위해 구명시식이라도 올리고 싶다는 게 그 사람의 소망이었다. 막상 구명시식을 올려보니, 역시 부모 영가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형제들을 나무랐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 “형이 못하면, 너라도 제사를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 가족들에게는 아무 말 하지 말고, 니가 제사를 올리도록 해라.” 아버님 영가의 허락이 있자, 그는 고개를 조아리며 앞으로는 열심히 제사를 올리겠다”며 약조를 했다.
제사에 대해서 황희 정승에 관한 글이 있다. 어느 날 황희 정승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 “아버지 제삿날에 우리 집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제사를 지낼 수 없겠죠?”라고 물었다. 이에 황희는 대답했다. “그야 지낼 수 없지”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 “우리 집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내일 아버지 제사는 지내야겠지요?”라고 물었다. 이에 황희는 “물론 모셔야지”라고 대답해 줬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부인이 물었다. “한 사람은 안 된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된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황희가 말하기를 “소나 돼지를 낳는 것보다 제사가 더 중요한 것인데, 제사를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내라 하고, 지내고 싶지 않는 사람은 지내지 말라고 했을 뿐이오.”
제사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제사라는 것이 조상을 기리는 것이지만 어찌 보면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좋은 복을 주십사하는 마음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문제 삼는 가정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정이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선지 한국뿐 아니다. 제사는 미국 한인 사회에서도 큰 이슈다. 특히나 미국에서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바로 ‘시차’다. 제사를 올리되, 한국시차에 맞춰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미국 시차대로 올려야 하는지, 참으로 난감했던 모양. 이럴 땐 굳이 한국 시차를 따를 필요 없이, 미국 시차에 맞춰 제사를 올려도 무방하다 하겠다. 영가님들은 다들 알아서 잘 찾아오시니 말이다.
혹여 감옥에서 제사를 지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여건은 어렵겠지만, 장소 불문하고 최소한의 예를 갖춰 제사를 올려드리면 좋겠다. 효도란 교도소 담장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렇듯 영혼의 세계엔 시공이 따로 없음에 그저 정성껏 올린 따스한 밥 한 공기에 마음을 담아 제를 올린다면, 분명 복 받으리라 믿는다.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www.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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