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립 잡기노트]안중근 의사 계급, 최소한 대장

【서울=뉴시스】안중근 장군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진. 기존의 장군 사진들은 일제가 선전전략으로 만든 초췌한 죄인의 형상들뿐이다. 젊고 패기 넘치는 장군,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설파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다. 일제는 그토록 장군을 무서워했다.
안중근(1879~1910) 장군이 1910년 2월12일 오전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제5회 공판에서 최후진술을 한다. “나는 자객이 아니라 대한의병 중장이다. 이토는 한일친선을 저해하고, 동양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다. 나는 그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희망은 동양평화를 이루고, 5대양 6대주에 우리 동양인들이 모범을 보이자는 것이다.”
이틀 후 일제의 지방법원 재판장은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장군은 일제의 고등법원장을 만나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도록 사형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한다. 충분한 시간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장군은 항소를 포기한다.
이어 서문, 전감, 현상, 복선, 문답 등 5개 항목으로 나눠 동양평화론을 구상하고 집필에 들어간다. 그러나 일제는 서둘러 형을 집행한다. 장군은 서문과 전감의 일부만을 유고로 남긴 채 순국한다. 동양평화론이 섬뜩하고 예언적인 경고로 절필된 이유다.
“슬프다! 자연의 형세를 돌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 중국 하나라의 걸왕이나 은나라의 주왕과 같이 폭정과 주색을 일삼은 포악무도한 군주. 맹자는 천심과 민심을 잃고 버림받은 잔인한 도적에 불과한 이런 자들을 제거해도 된다고 함)가 당하는 재앙을 틀림없이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로부터 35년, 일제는 패망한다.
일제의 안중근 죽이기는 장군을 향한 민족의 사랑과 존경을 증폭한다. 장군이 남긴 유묵이 이승만 대통령이나 김구 선생의 것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은, 경박하되 이해가 쉬운 보기다.
장군은 중국의 근대혁명 과정에서 우파나 좌파를 떠나 모든 중국인의 우상이다. 국부 쑨원(孫文1866~1925)은 “백세의 삶은 아니지만, 죽어서 천추에 빛나도다”라며 장군을 기린다. ‘중국의 레닌’ 천두슈(陳獨秀 1879~1942)는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와 타고르가 되기보다 안중근과 콜럼버스가 되기를 바란다”는 경구를 남긴다.

【서울=뉴시스】일제의 관헌들도 안중근 장군의 높은 이상을 존경하게 됐다. 지필묵을 넣어주며 글씨를 청했다. 장군은 야스오카 세이시로라는 검찰관에게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 나라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대해 애타는 마음으로 걱정한다)라는 글을 선물했다. 뤼순 형무소에 근무하면서 안중근 장군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에게 장군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귀국 후 장군에게서 받은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나라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유묵과 위패를 모셔놓고 평생 아침저녁으로 장군의 명복을 빌었다.
“장군은 바른 삶, 언행일치의 삶의 전형을 실천한 유별난 분이었다. 권력과 돈 있는 자들에게 큰소리 쳤고, 벼슬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으며, 나라를 구하고 동양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처자식을 굶기면서 헌신하다가 가문을 위태롭게 했다”고 짚는다.
장군은 친구와 의리를 맺는 것,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것, 총으로 사냥하는 것,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술을 끊기로 결심한다. 이후 타계할 때까지 그리도 좋아하는 술을 한 잔도 입에 대지 않는다. “장군은 나라 잃은 설움을 술로 달랜다거나 자살하는 졸장부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대장부였다.”
장군은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라는 초패왕 항우(BC 232~202)의 말을 인용하면서, 장부의 삶을 살겠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한다. 하지만 이 원장은 “거사 후 신문 및 공판 과정에서 장군이 보여준 학문·지식·정보·지성은 일제관헌을 압도했고 감동시켰다. 힘만 믿고 학문을 멀리한 항우를 능가하는 영웅”이라고 특기한다.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황제를 폐위하며, 강제로 국권을 빼앗고,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하는 등 동양평화를 해친 일제의 상징이다. “장군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독부를 제거한 영웅이다. 몇 만 대군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장군의 행위가 죄 없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테러행위였더라면, 또한 이렇게 탁월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면, 그분의 이상이 아무리 숭고했더라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혀버렸을 것”이라며 결과도 중시한다.
장군은 국제법을 준수한 정의로운 지휘관, 인류애와 박애정신을 실천한 지휘관이다. 일본군 포로들을 총포까지 되돌려줘가며 석방하는 이상주의적인 행동으로 동지들로부터 소외당하고 패전하는 쓰라림도 감수한다. 이 원장은 “그렇지만 장군은 당신이 흠모한 미국 독립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 중장(1732~1799 미국 초대대통령)보다도 더 인간미 넘치는 군인이었다”고 귀띔한다.

【서울=뉴시스】1964년 9월 전남 장흥에서 열린 안중근 장군 추도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보낸 추도시. 박정희는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1972년 1월 ‘祖國統一 世界平和’(조국통일 세계평화)라는 휘호를 보냈고, 1979년 9월 ‘民族正氣의 殿堂’(민족정기의 전당) 휘호를 가로 6.4m 높이 3.3m 두께 1.2m 무게 60t의 거대한 현무암에 새기도록 했다. 안중근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동격의 위인으로 높이려 했으나 그해 10월26일 시해당하고 말았다.
미국 독립전쟁도 마찬가지다. 1776년 영국 식민지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1783년까지 7년간 독립전쟁을 벌인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당대 미국은 독립을 선언했을 뿐 국가조직이 없고 정규군도 없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정규군이 아니다. 별이 셋 달린 제복을 입고 싸울 따름이다.
장군은 “옛날 미국 독립의 주인공 조지 워싱턴은 7~8년 동안 바람과 먼지 속에서 그 많은 곤란과 고초를 어떻게 참고 견뎠을까? 참으로 만고에 둘도 없는 영웅이다. 앞으로 내가 일을 성취하면 반드시 미국으로 가서 워싱턴을 추모하고 숭배하며 그가 남긴 뜻을 기념하리라”고 자서전에 남긴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정규 군인이 되는 것은 2차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사망하기 1년 전이다. 1798년에 미군 중장 계급장을 받는다. 미국 독립 200주년인 1976년에는 포드 대통령에 의해 대원수로 추서된다.
이 원장은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조지 워싱턴이 그랬던 것처럼 중장 계급으로 전쟁에 임하고 싶어 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군 계급장을 가졌는데, 장군은 아직도 대한민국 군인 계급장이 없다. 장군에게도 국군 중장 이상의 계급이 추증돼야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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