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사태 진압 거부한 中 군사령관 “무력 아닌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해야”
쉬친센 38군 사령관 비공개 군사재판 6시간 분량 영상 유투브 공개
군 명령 복종해야 하지만 자신은 진압 불참 거듭 밝힌 뒤 구금
‘명령 불복종’ 등 혐의로 이듬해 비공개 군사재판 5년 선고, 2021년 사망
![[서울=뉴시스] 1990년 3월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진술하는 쉬친센 전 38군 사령관.(출처: 유투브) 2025.12.18.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5/12/19/NISI20251219_0002022635_web.jpg?rnd=20251219100939)
[서울=뉴시스] 1990년 3월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진술하는 쉬친센 전 38군 사령관.(출처: 유투브) 2025.12.18.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군은 민간인 군통수권자의 명령을 어디까지 따라야 하나. 불법명령에는 복종 의무가 없나.
11일(현지 시각) 미국 연방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그레고리 기요 북부사령부 사령관은 명령의 합법성 여부를 따져본 뒤 집행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불법 이민자 단속 검거 등을 위한 주방위군 투입에 대한 민주당 잭 리드 상원의원(로드아일랜드)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한국도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계엄 과정에 참가한 군 지휘관들이 줄줄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 톈안먼 사태 유혈진압을 거부했던 군 사령관의 비공개 재판 장면이 유투브를 통해 공개됐다. 재판이 진행된 지 35년 만에 대만 역사학자 등이 공개했다.
1990년 재판, 35년만에 대만 역사학자에 의해 공개돼
그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입해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가 왜 명령을 거부했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공개된 6시간 분량의 비밀 군사재판 영상은 쉬 장군과 당시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이 군대를 베이징으로 파병하기 위해 준비하던 시기의 군 내부 긴장 상황을 보여준다고 뉴욕타임스(NYT)는 18일 전했다.
NYT는 중국 군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과 반대 의견을 담은 영상이 공개되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진술은 재판에서 판사와 검사가 인용한 다른 장군들의 증언과 함께 중국 지도자들이 어떻게 비밀리에 계엄령 계획을 수립하고 전달했으며, 인민해방군 내의 우려를 억누르려 했는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NYT는 평가했다.
중국 국내에서는 차단된 플랫폼인 유튜브에 공유된 이 영상은 한 채널에서만 100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NYT는 전했다.
쉬 “개인적인 양심과 직업적 판단에 따라 명령 거부”
재판 영상에서 쉬 장군은 개인적인 양심과 직업적 판단에 따라 명령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재판관들에게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면 영웅이 되고 수행하지 못하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며 무장 병력을 민간인에게 보내는 것은 혼란과 유혈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에서 수수한 사복 차림의 쉬 장군은 방청객이 아무도 없는 법정에서 자비를 구걸하지 않고 왜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는지 간결하게 설명했다.
쉬 장군은 재판관들에게 자신이 명령을 거부한 것은 38군을 대표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견이었다고 말했다.
쉬 장군은 다른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개별적으로 명령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NYT는 전했다.
이는 장군들이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수 있다고 현재 대만에 거주하는 중국 출신 독립 역사학자 우런화는 말했다.
1989년 민주화 운동과 진압에 대한 여러 연구서를 저술한 우런화는 쉬 장군의 재판을 통해 계엄령 명령이 구두로 전달되어 문서 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우 전문가는 “이 영상은 30년 넘게 6월 4일 사건 관련 자료를 수집해 오면서 접한 자료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쉬 장군의 불복종은 6·4 사태의 중추적인 사건이었지만 이 영상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많은 세부 사항이 불분명했다”고 말했다.
우 씨는 1989년 베이징에서 젊은 학자로 활동하며 톈안먼 광장 시위에 참여했다. 우 씨는 해당 영상을 온라인에 게시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게시한 것을 보고 자신도 게시했다며 신뢰할 만한 출처로부터 영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대 제레미 브라운 교수는 “쉬 장군이 양심에 따라 소신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읽는 것과 법정에서 서 있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라고 말했다.
브라운 교수는 “쉬 장군이 군사 전문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말했다.
브라운 교수와 톈안먼 사태 전문가인 티모시 브룩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명예교수는 우런화 등이 올린 영상의 진위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베이징 145㎞ 떨어진 부대 1만 5000명 병력 동원 명령
몇 주 동안 학생들은 톈안먼 광장을 점거하고 정치적 자유화를 요구했다.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소요 사태를 단호하게 종식시키기를 원했다.
쉬 장군은 신장 결석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베이징 군구 사령부로 소환됐다.
중국 지도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기로 결정했고 쉬 장군은 베이징에서 약 145㎞ 떨어진 곳에 주둔 한 정예 부대인 제38군에서 약 1만 5000명의 병력을 차출해 초기 5만 명 규모의 병력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쉬 장군은 법정에서 계엄령 발령에 대해 “이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시위는 무력이 아닌 정치적 수단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중앙 정부가 군대 투입을 명령한다면 베이징 외곽 지역에만 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쉬 장군은 38군이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자신은 작전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그는 법정에서 “상사들이 저를 임명할 수도 있고 해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자신의 명령 불복종 결정으로 인해 직위를 잃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회의에 참석했던 장군 중 한 명인 다이징성은 조사관들에게 자신과 동료들이 쉬 장군의 반항적인 발언을 듣고 약 1분간 침묵했다고 진술했다.
증언에 따르면 다이 장군은 “아무도 쉬 장군에게서 이런 말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쉬 장군은 군이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지시를 받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군이 보다 광범위한 권위에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휘관들에게 이처럼 중대한 명령은 먼저 당과 정부의 고위 관리들 사이에서 더 폭넓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당내 온건파들이 대학살로 치닫는 상황을 막기 위해 개입해 주기를 바랐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도 논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쉬 장군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민해방군이 국가 체제에 편입되었으므로 당 지도부뿐만 아니라 정부와 국회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공산당 지도부, 특히 시진핑 주석은 ‘국가의 군대’라는 개념이 당의 군대 통제에 위협이 된다며 비난해 왔다고 NYT는 설명했다.
워싱턴 아메리칸대 중국 공산당 역사학자 조셉 토리건은 재판 영상을 분석한 결과 “쉬 장군은 자신의 우려 표명이 더 높은 곳에 전달되어 계엄령 발동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토리간은 “이번 재판을 통해 군 내부에서도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한 대화와 소통이라는 선택지가 아직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군은 명령 따라야 하지만 자신은 불참 의사 밝힌 뒤 구금
베이징 회의에서 지휘관들의 압박을 받은 그는 전화 통화로 38군 동료에게 계엄령 명령을 전달했지만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도 분명히 밝혔다.
이후 그는 명령을 전달했던 지휘관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한번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했다.
다음 날 38군 장교 한 명이 쉬 장군에게 베이징으로 진격할 경우 군대와 함께 해달라고 간청하자 이에 동의했으나 그때는 이미 상황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
재판 증언에 따르면 군 부주석 중 한 명은 쉬 장군의 행동에 대해 “이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위 지도부는 그와 제38군 장교들의 연락을 차단했고 그는 이후 구금됐다.
새로운 지휘관의 지휘 아래 제38군은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NYT는 톈안먼 진압은 무자비한 진격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저항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구경꾼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고 전했다.
톈안먼 사태 유혈진압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수백명에서 수천명까지 다양하다고 NYT는 전했다.
쉬 장군은 이듬해 3월 군사재판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21년 1월 8일 허베이성 스자좡의 한 군병원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출소 이후에도 가택연금과 당국의 감시 속에서 살았다.
심각한 안구 질환 등 건강 문제를 겪던 그는 사망 당일 음식물이 목에 걸려 질식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 자녀 외에는 다른 조문객은 장례식장 방문이 금지됐다.
그의 이야기는 여러 책과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그는 2011년 홍콩의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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