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없는 시장, 시장 없는 제도…한국 가상자산의 딜레마[기자수첩]
1년째 법안 논의만 제자리…규제 공백이 부른 역설

[서울=뉴시스]송혜리 기자 =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가 가상자산 전반의 법적 기준을 정비하는 '클래리티 법안' 심사(마크업)를 오는 14일(현지시각)로 확정했다. 가상자산을 증권·상품·기타 자산으로 구분해 규제 당국의 관할권과 법적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게 핵심이다.
전통 금융권과 가상자산 업계 간 막판 기싸움이 남아 있지만, 미국이 제도의 틀을 속도감 있게 완성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반면 국내 상황은 대조적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가상자산 규제안을 마련 중이라고 했지만, 1년 가까이 입법 논의 단계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대선 공약으로 공식화된 이후 국회에는 8건 이상의 관련 법안이 발의됐고, 올해 2월까지 학계와 국회를 중심으로 7차례 이상의 토론회가 열렸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자산 태스크포스(TF)가 디지털자산기본법을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에 올리기로 했지만 소위를 여는 데 실패했다. 마침내 오는 12일 법안심사제1소위원회가 열리지만 현재까지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안건에 오르지 못한 상황이다.
논의는 원화 스테이블 코인 발행 주체(은행 대 비은행), 준비자산 100% 의무화 여부, 이자 지급 허용 범위, 감독 권한(금융위 대 한국은행), 해외 스테이블코인 규제 방식, 코인런 등 거시 리스크까지 매번 같은 쟁점을 맴돌았다. 거래소 논의도 대주주 지분 제한 수준에서 제자리를 걸었다.
이 공백의 대가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쌓이고 있다. 미국이 제도를 정비하고 기관 자금이 밀려드는 동안 국내 시장은 규제의 그늘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업비트·빗썸·코인원이 금융정보분석원(FIU) 처분에 잇달아 불복하며 법정 다툼을 벌이는 풍경이 그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 갈등이 쌓이고, 갈등이 쌓이니 시장은 한켠에 불확실성을 안고 간다.
이런 가운데 국내 시장 체력은 약화되는 반면 자금의 해외 이탈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타이거리서치에 따르면 국내 가상자산 시장 신규 유입자 증가율은 2024년 하반기 24.7%로 정점을 찍은 뒤 지난해 상반기 11%, 하반기 5.2%로 가파르게 낮아졌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줄고 있다는 뜻이다. 일평균 거래 규모도 5조4000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대비 하반기에 15% 감소했고, 거래소 영업손익도 같은 기간 38% 급감했다.
지난해 한국 투자자들이 국내 가상자산거래소에서 해외 거래소로 이체한 자금은 약 160조원(1100억달러)으로 추산된다. 타이거리서치는 업비트와 빗썸 등 국내 거래소 이용이 정체된 반면 바이낸스, 바이비트 등 해외 거래소 이용은 증가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제도가 능사는 아니다. 혁신을 옥죄는 과도한 규제 시장을 망친다. 그러나 제도의 공백이 시장을 교란한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2022년 테라-루나 사태가 그 교훈을 가장 값비싸게 증명했다. 수십조원이 증발하는 동안 피해는 정교한 투자자가 아닌 가장 약한 개인에게 집중됐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완벽한 제도가 아니라 '방향성'이다. 기준을 세우고 움직이기 시작해야 시장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제도가 비어 있는 시간만큼 글로벌 시장과의 격차도 벌어진다. 지금은 출발선을 넘어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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