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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의 원류] 세계중요농업유산 제주 밭담…언제부터 쌓였나

등록 2026.10.16 07:00:00

탐라시대 외도동·금성리 유적서 석축 확인…돌 쌓기 문화의 오랜 역사

고려시대 토지 경계·농작물 보호에 활용…화산섬 농경·목축과 함께 발달

2만㎞ 넘는 '흑룡만리'…지역별 재료·축조방식 다양, 농업환경 따라 변화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일대 농경지에 밭담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크고 작은 현무암을 쌓아 만든 밭담은 농경지의 경계를 구분하고 우마와 바람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왔다. 2026.10.16.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일대 농경지에 밭담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크고 작은 현무암을 쌓아 만든 밭담은 농경지의 경계를 구분하고 우마와 바람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왔다. 2026.10.16. [email protected]


제주는 오랫동안 '변방의 섬'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제주문화의 깊은 층위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동아시아 해역을 잇던 해상교류의 거점이었으며 제주 사람들은 화산섬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돌과 바람, 불과 흙을 다루며 고유한 생활문화를 일궈왔다. 문헌과 유적, 생활문화와 구술, 자연환경과 생업의 흔적을 따라가며 제주가 지닌 독창성과 개방성을 살펴보고 문화콘텐츠로 확장될 가능성을 함께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크고 작은 돌을 차곡차곡, 얼기설기 쌓아 만든 제주의 밭담은 마을 주변에서 산간까지 뻗어 있다. 밭과 밭 사이를 구분하며 굽이굽이 이어지는 돌담은 제주 농촌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제주 밭담은 2013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으며 이듬해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됐다. 화산섬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농사를 이어온 주민들의 생활문화와 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러한 제주 밭담의 가치를 알리는 제10회 제주밭담축제가 18일부터 11월1일까지 도내 8개 마을에서 열린다. 올해는 참가자들이 밭담 길을 직접 걸으며 농촌 경관과 생활문화를 살펴보고 마을별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제주 사람들은 언제부터 밭에 돌담을 쌓기 시작했으며 섬 전역에 펼쳐진 밭담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제주 밭담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탐라시대의 석축문화에서 출발해 고려·조선시대 목축과 토지경계 관계로 이어진다.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밭담 길을 걷는 축제 참가자. (사진=뉴시스DB)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밭담 길을 걷는 축제 참가자. (사진=뉴시스DB) [email protected]


탐라시대 외도동·금성리 유적에 남은 석축문화

제주에서 돌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주시 외도동과 애월읍 금성리 유적에 이른다. 3~6세기 탐라 전기의 이들 유적에서는 돌을 쌓아 공간을 구분하거나 보호했던 석축시설이 확인됐다.

외도동 유적은 탐라시대의 대표적인 거점취락이다. 주거지를 비롯해 공동 창고와 공공 건물, 석조우물 등이 조성됐으며 취락의 중심부에는 다른 공간과 구분하기 위한 석축이 설치됐다.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은 외도동의 경계석축을 취락 중심구역을 방어하고 다른 공간과 구분하기 위한 시설로 분석했다. 중심구역은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탐라사회가 대규모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고 전문 기술집단을 운영할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해석했다.

금성리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석축시설이 발견됐다. 금성리 유적에서 확인된 대형 석축은 현무암을 7단 이상 겹겹이 쌓아 만들었다. 확인된 길이는 62.2m, 높이는 1.8~2.1m, 폭은 4.2~4.5m에 이른다. 비교적 큰 현무암을 외벽에 쌓고 내부에는 작은 돌과 흙 등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조했다.
[제주=뉴시스]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유적에서 발굴된 탐라시대 대형 석축시설. (사진=국립제주박물관 도록에서 캡처) photo@newsis.com

[제주=뉴시스]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유적에서 발굴된 탐라시대 대형 석축시설. (사진=국립제주박물관 도록에서 캡처)  [email protected]


이들 유적은 탐라시대 사람들이 주변의 돌을 이용해 상당한 규모의 구조물을 축조하고 생활공간을 구분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외도동과 금성리의 석축은 오늘날 농경지에 쌓은 밭담과 용도가 다르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이 이미 탐라시대에 돌을 활용해 생활공간을 구분하고 보호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밭담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탐라시대 돌담의 흔적은 중국 문헌에도 남아 있다. 당나라의 제도와 역사자료를 모아 송나라 때 편찬한 당회요(唐會要)에는 당시 탐라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기옥우위원장 이초개지(其屋宇爲圓牆 以草蓋之)'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집을 둥근 담장 형태로 만들고 풀로 지붕을 덮었다는 뜻이다. 당회요에는 661년 탐라에서 당나라로 조공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당시 중국에 전해진 탐라의 생활상 가운데 둥근 담장과 풀로 덮은 지붕이 주거 형태의 특징으로 기록된 것이다.

가축 피해를 막고, 토지경계를 명확히 한 밭담

문헌을 통해 제주 밭담이 구체적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고종 때 제주판관을 지낸 김구(1211~1278)가 돌을 모아 담을 쌓도록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당시 제주에서는 밭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힘 있는 집안이 다른 사람의 농경지를 조금씩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1234년 부임한 김구는 주민들의 고충을 듣고 돌담을 쌓아 경계를 명확하게 했다는 것이다.

1801년 간행된 지포선생문집에는 '사슴과 말이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고통을 받자, 김구가 돌담을 쌓아 경계를 바로잡고 짓밟히는 피해를 막았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후 조선시대 문헌에서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돌담을 둘렀다는 내용은 다수 등장한다. 1577년 제주를 찾은 문인 임제는 남명소승에서 '산에는 짐승이 돌아다니고 들에는 기르는 가축들이 수백, 수천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녔다'고 기록했다. 이어 밭농사를 지으려면 반드시 돌담을 둘러야 하며 사람들이 사는 집에도 높은 담을 만들어 골목을 이룬다고 설명했다.
[제주=뉴시스]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의 제주 순력과 행사 장면을 담은 탐라순력도의 '귤림풍악' 부분. 감귤 과원에서 풍악을 즐기는 모습인데 주변이 돌담과 대나무로 둘러져 경계를 구분하고 있다. (사진=제주도 홈페이지 탐라순력도에서 캡처) photo@newsis.com

[제주=뉴시스]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의 제주 순력과 행사 장면을 담은 탐라순력도의 '귤림풍악' 부분. 감귤 과원에서 풍악을 즐기는 모습인데 주변이 돌담과 대나무로 둘러져 경계를 구분하고 있다. (사진=제주도 홈페이지 탐라순력도에서 캡처) [email protected]


1601년 제주에 안무어사로 파견된 김상헌도 남사록에 비슷한 모습을 남겼다. 김상헌은 애월에서 도근천으로 이동하면서 길가의 농경지를 관찰했다. 당시 밭머리 사면에는 주먹만 한 돌을 모아 쌓은 담이 있었으며 목장의 말이 함부로 뛰어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제주의 돌담은 탐라시대 신성한 공간이나 특수한 공간을 구분 짓는 역할에서 시작해 집을 지키는 울담, 밭을 보호하는 밭담 등으로 점차 다양하게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산섬의 자연환경이 만든 2만㎞ 넘는 밭담

제주 밭담의 형성에는 화산섬이라는 자연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밭을 일굴 때마다 크고 작은 돌이 나왔고 이를 제거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주민들은 골라낸 돌을 경계에 쌓아 경작지를 정리하면서 바람과 가축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했다.

돌담 사이의 틈으로 바람이 통과하는 구조도 특징이다. 돌의 크기와 형태에 맞춰 쌓아 올린 밭담은 강한 바람을 분산시키고 토양과 씨앗이 날아가는 것을 줄이는 역할을 했다.

밭담은 농경지의 경계를 구분하고 농작물을 보호하는 시설이면서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나온 돌을 처리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농경지를 개간하고 경작지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쌓인 돌담은 오랜 세월 제주 전역으로 확산됐다.

제주 밭담은 길이가 워낙 길어 '흑룡만리'라고 불린다. 검은 용이 들녘을 가로질러 길게 뻗은 모습을 연상시킨다는 뜻이다.
밭담의 전체 길이로 널리 알려진 수치는 2만2108㎞다. 2007년 제주도 내 6개 지역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전체 경지 면적에 적용해 산출한 추정치다.

2019년 박종준·권윤구 연구자는 제주지역 농지 300개 필지를 표본으로 선정해 항공사진과 지적도를 비교하고 현장조사를 실시해 제주 밭담의 길이를 새롭게 추정했다.

연구진이 농지의 둘레길이를 기준으로 추정한 전체 밭담 길이는 2만3938~2만9473㎞였다. 기존의 2만2108㎞보다 긴 수치다.

지역마다 다른 재료와 축조방식

밭담은 제주 전역에 분포하지만 지역에 따라 높이와 두께, 재료가 다르다.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와 애월읍 금성리에서는 크고 작은 돌을 여러 겹 쌓아 만든 폭이 넓고 높은 밭담이 많이 나타난다. 농경지에서 나온 돌이 많아지면서 담의 규모도 커진 것이다.

돌을 쌓아 사람이 오갈 수 있도록 만든 '잣질'도 특징적인 형태다. 농경지에서 나온 돌을 처리하는 동시에 길과 접하지 않은 밭으로 드나드는 통로 역할을 했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역시 돌이 많은 지질적 환경을 반영해 다양한 형태의 밭담이 발달했다.

반면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서는 돌담이 드문 농경지를 볼 수 있다. 퇴적층과 점토질 토양이 분포해 경작과정에서 돌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오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돌 대신 흙으로 밭의 경계를 만들었으며 이를 '두럭'이라고 부른다. 돌담을 두르지 않은 농경지를 '무장전'이라고 한다.

밭담을 쌓는 재료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에서는 현무암과 다른 색과 재질을 가진 퇴적암으로 쌓은 밭담이 확인된다. 안덕면 사계리의 산방산 주변에는 회색 계통의 조면암을 이용한 돌담도 남아 있다. 제주시 내도동의 해안가에서는 파도와 하천의 작용으로 둥글게 마모된 돌을 활용한 사례도 볼 수 있다.

밭담 연구자인 강성기 박사(한라초등교 교감)는 "이러한 지역별 차이가 제주 밭담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라며 "밭담의 높이와 두께, 재료, 분포는 그 지역의 지질과 토양, 농경지의 이용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농경지에 크고 작은 현무암을 쌓아 만든 밭담이 이어져 있다. 앞쪽에는 큰 돌로 바깥면을 쌓고 내부에 작은 돌을 채워 넣은 겹담 구조가 드러나 있다. 2026.10.16.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농경지에 크고 작은 현무암을 쌓아 만든 밭담이 이어져 있다. 앞쪽에는 큰 돌로 바깥면을 쌓고 내부에 작은 돌을 채워 넣은 겹담 구조가 드러나 있다. 2026.10.16. [email protected]

돌담을 쌓을 때는 아래쪽에 크고 안정적인 기초돌을 놓고 위로 올라가면서 서로 엇갈려 맞물리도록 배치한다. 시멘트 등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석의 형태와 표면의 마찰력을 이용하는 것이 전통적인 축조기술의 특징이다.

조환진 돌빛나예술학교 교장은 "제주 돌담의 축조방식을 조사한 결과 지역마다 돌의 크기와 형태가 달라 쌓는 기술에도 차이가 나타난다"며 "밭담은 주로 농경지를 일구는 주민들이 직접 쌓고 보수하면서 기술이 전승됐다"고 말했다.

곡선에서 직선으로…농업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진 밭담

오랜 세월 제주 들녘에 자리 잡았던 밭담은 근현대에 들어서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전통적인 밭담은 농경지의 지형과 경계를 따라 구불구불한 곡선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밭에서 나온 돌을 경계에 쌓고 농사짓기 어려운 암반을 피해 돌담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습이다.

그러나 농업기계화와 경지정리사업이 확대되면서 밭담의 형태도 달라졌다. 농기계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농경지를 넓히고 불규칙한 경계를 직선으로 정리하면서 기존 돌담이 철거되거나 다시 쌓였다.

돌담을 쌓는 재료와 기술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과거에는 주변에서 구한 자연석을 형태에 맞춰 쌓았지만 운반 장비와 가공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른 지역의 돌을 가져오거나 기계로 다듬어 시멘트를 사용하는 사례도 늘었다.

제주 밭담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 농사에 필요한 시설이었던 밭담은 국가중요농업유산과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되면서 보전해야 할 문화경관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강 박사는 "밭담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쌓고 허물어진 곳을 보수하면서 유지해 온 생활유산"이라며 "농업인구의 감소와 기계화, 농지 이용의 변화 속에서 전통적인 돌담을 관리하고 축조기술을 이어가는 일도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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