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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감독 오시마 나기사 별세…'감각의 제국' 거장

등록 2013.01.15 22:40:16수정 2016.12.28 06: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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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전후 최고의 일본 영화감독으로 손꼽히는 오시마 나기사(81)가 별세했다.  오시마 감독은 15일 오후 3시25분께 가나가와 현 후지사와 시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일본 뉴웨이브 영화의 기수로 일본의 군국주의와 광기, 검열을 격렬하게 비판한 감독이다.  교토대 법학부 출신인 오시마 감독은 1955년 쇼치쿠 영화사에 조감독으로 입사한 뒤 1959년 '사랑과 희망의 길'로 데뷔했다.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소년과 부르주아 소녀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비둘기를 사살하는 장면이 문제가 돼 2류급 영화관에서 상영하면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해 두 번째 영화 '청춘 잔혹이야기'를 통해 단숨에 스타 감독으로 떠올랐다. 부모를 버린 청춘남녀의 파멸을 그린 이 영화는 쇼치쿠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걸작으로 통한다. 폭력, 섹스 등 오시마 감독이 평생 천착한 소재를 다루며 은밀하게 일본 정치적 근본주의를 까발렸다.  이후 '태양의 묘지' '일본의 밤과 안개' 등 실험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작을 잇따라 만들며 1960년대 뉴웨이브 영화 운동을 이끌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일본에 남아 비루한 생활을 하는 재일 한국인을 다룬 다큐멘터리 '잊혀진 황군'을 만들었고, 1964년 한국을 찾아왔다.  1965년에는 한국 초등학생 이윤복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바탕 삼아 내한 당시 찍은 스틸사진 등을 엮어 만든 '윤복이의 일기'를 제작했다. 1968년에는 두 명의 일본인 소녀를 강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1963년 사형 당한 재일 한국인 고등학생 이진우의 실화를 소재로 '교사형'을 연출, 일본의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재일한국인 최양일 감독(64·일본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이 오시마 감독의 연출부를 거쳤다.  오시마 감독은 1970년대 들어 정치적 문제보다 개인의 도덕과 성애의 문제에 주력하면서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랐다. 1976년 칸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상영된 '감각의 제국'은 여인숙에 틀어박혀 섹스에만 몰두하던 남녀의 파국을 통해 군국주의가 팽배한 1930년대 중반 일본사회를 지적했다.  이 영화로 인해 재판을 받기도 했으나 칸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들으며 시카고 국제영화제 특별상, 영국 영화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2년 뒤 다시 한번 섹스와 범죄를 다룬 '열정의 제국'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따냈다.  1983년에는 영국 영화배우 겸 가수 데이비드 보위(66), 일본 영화감독 겸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66), 일본 뉴웨이브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61) 등 호화 캐스팅을 내세운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발표했다. 일본인의 서양인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애증과 동성애를 다루면서 호평을 얻었다.  1987년 '막스 내사랑' 이후 12년 만인 1999년 내놓은 사무라이 영화 '고하토' 촬영 직전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휠체어에 의지해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이후 병마와 싸워왔다.    realpaper7@newsis.com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전후 최고의 일본 영화감독으로 손꼽히는 오시마 나기사(81)가 별세했다.

 오시마 감독은 15일 오후 3시25분께 가나가와 현 후지사와 시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일본 뉴웨이브 영화의 기수로 일본의 군국주의와 광기, 검열을 격렬하게 비판한 감독이다.

 교토대 법학부 출신인 오시마 감독은 1955년 쇼치쿠 영화사에 조감독으로 입사한 뒤 1959년 '사랑과 희망의 길'로 데뷔했다.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소년과 부르주아 소녀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비둘기를 사살하는 장면이 문제가 돼 2류급 영화관에서 상영하면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해 두 번째 영화 '청춘 잔혹이야기'를 통해 단숨에 스타 감독으로 떠올랐다. 부모를 버린 청춘남녀의 파멸을 그린 이 영화는 쇼치쿠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걸작으로 통한다. 폭력, 섹스 등 오시마 감독이 평생 천착한 소재를 다루며 은밀하게 일본 정치적 근본주의를 까발렸다.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전후 최고의 일본 영화감독으로 손꼽히는 오시마 나기사(81)가 별세했다.  오시마 감독은 15일 오후 3시25분께 가나가와 현 후지사와 시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일본 뉴웨이브 영화의 기수로 일본의 군국주의와 광기, 검열을 격렬하게 비판한 감독이다.  교토대 법학부 출신인 오시마 감독은 1955년 쇼치쿠 영화사에 조감독으로 입사한 뒤 1959년 '사랑과 희망의 길'로 데뷔했다.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소년과 부르주아 소녀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비둘기를 사살하는 장면이 문제가 돼 2류급 영화관에서 상영하면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해 두 번째 영화 '청춘 잔혹이야기'를 통해 단숨에 스타 감독으로 떠올랐다. 부모를 버린 청춘남녀의 파멸을 그린 이 영화는 쇼치쿠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걸작으로 통한다. 폭력, 섹스 등 오시마 감독이 평생 천착한 소재를 다루며 은밀하게 일본 정치적 근본주의를 까발렸다.  이후 '태양의 묘지' '일본의 밤과 안개' 등 실험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작을 잇따라 만들며 1960년대 뉴웨이브 영화 운동을 이끌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일본에 남아 비루한 생활을 하는 재일 한국인을 다룬 다큐멘터리 '잊혀진 황군'을 만들었고, 1964년 한국을 찾아왔다.  1965년에는 한국 초등학생 이윤복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바탕 삼아 내한 당시 찍은 스틸사진 등을 엮어 만든 '윤복이의 일기'를 제작했다. 1968년에는 두 명의 일본인 소녀를 강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1963년 사형 당한 재일 한국인 고등학생 이진우의 실화를 소재로 '교사형'을 연출, 일본의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재일한국인 최양일 감독(64·일본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이 오시마 감독의 연출부를 거쳤다.  오시마 감독은 1970년대 들어 정치적 문제보다 개인의 도덕과 성애의 문제에 주력하면서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랐다. 1976년 칸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상영된 '감각의 제국'은 여인숙에 틀어박혀 섹스에만 몰두하던 남녀의 파국을 통해 군국주의가 팽배한 1930년대 중반 일본사회를 지적했다.  이 영화로 인해 재판을 받기도 했으나 칸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들으며 시카고 국제영화제 특별상, 영국 영화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2년 뒤 다시 한번 섹스와 범죄를 다룬 '열정의 제국'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따냈다.  1983년에는 영국 영화배우 겸 가수 데이비드 보위(66), 일본 영화감독 겸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66), 일본 뉴웨이브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61) 등 호화 캐스팅을 내세운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발표했다. 일본인의 서양인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애증과 동성애를 다루면서 호평을 얻었다.  1987년 '막스 내사랑' 이후 12년 만인 1999년 내놓은 사무라이 영화 '고하토' 촬영 직전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휠체어에 의지해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이후 병마와 싸워왔다.    realpaper7@newsis.com

 이후 '태양의 묘지' '일본의 밤과 안개' 등 실험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작을 잇따라 만들며 1960년대 뉴웨이브 영화 운동을 이끌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일본에 남아 비루한 생활을 하는 재일 한국인을 다룬 다큐멘터리 '잊혀진 황군'을 만들었고, 1964년 한국을 찾아왔다.

 1965년에는 한국 초등학생 이윤복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바탕 삼아 내한 당시 찍은 스틸사진 등을 엮어 만든 '윤복이의 일기'를 제작했다. 1968년에는 두 명의 일본인 소녀를 강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1963년 사형 당한 재일 한국인 고등학생 이진우의 실화를 소재로 '교사형'을 연출, 일본의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재일한국인 최양일 감독(64·일본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이 오시마 감독의 연출부를 거쳤다.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전후 최고의 일본 영화감독으로 손꼽히는 오시마 나기사(81)가 별세했다.  오시마 감독은 15일 오후 3시25분께 가나가와 현 후지사와 시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일본 뉴웨이브 영화의 기수로 일본의 군국주의와 광기, 검열을 격렬하게 비판한 감독이다.  교토대 법학부 출신인 오시마 감독은 1955년 쇼치쿠 영화사에 조감독으로 입사한 뒤 1959년 '사랑과 희망의 길'로 데뷔했다.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소년과 부르주아 소녀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비둘기를 사살하는 장면이 문제가 돼 2류급 영화관에서 상영하면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해 두 번째 영화 '청춘 잔혹이야기'를 통해 단숨에 스타 감독으로 떠올랐다. 부모를 버린 청춘남녀의 파멸을 그린 이 영화는 쇼치쿠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걸작으로 통한다. 폭력, 섹스 등 오시마 감독이 평생 천착한 소재를 다루며 은밀하게 일본 정치적 근본주의를 까발렸다.  이후 '태양의 묘지' '일본의 밤과 안개' 등 실험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작을 잇따라 만들며 1960년대 뉴웨이브 영화 운동을 이끌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일본에 남아 비루한 생활을 하는 재일 한국인을 다룬 다큐멘터리 '잊혀진 황군'을 만들었고, 1964년 한국을 찾아왔다.  1965년에는 한국 초등학생 이윤복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바탕 삼아 내한 당시 찍은 스틸사진 등을 엮어 만든 '윤복이의 일기'를 제작했다. 1968년에는 두 명의 일본인 소녀를 강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1963년 사형 당한 재일 한국인 고등학생 이진우의 실화를 소재로 '교사형'을 연출, 일본의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재일한국인 최양일 감독(64·일본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이 오시마 감독의 연출부를 거쳤다.  오시마 감독은 1970년대 들어 정치적 문제보다 개인의 도덕과 성애의 문제에 주력하면서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랐다. 1976년 칸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상영된 '감각의 제국'은 여인숙에 틀어박혀 섹스에만 몰두하던 남녀의 파국을 통해 군국주의가 팽배한 1930년대 중반 일본사회를 지적했다.  이 영화로 인해 재판을 받기도 했으나 칸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들으며 시카고 국제영화제 특별상, 영국 영화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2년 뒤 다시 한번 섹스와 범죄를 다룬 '열정의 제국'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따냈다.  1983년에는 영국 영화배우 겸 가수 데이비드 보위(66), 일본 영화감독 겸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66), 일본 뉴웨이브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61) 등 호화 캐스팅을 내세운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발표했다. 일본인의 서양인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애증과 동성애를 다루면서 호평을 얻었다.  1987년 '막스 내사랑' 이후 12년 만인 1999년 내놓은 사무라이 영화 '고하토' 촬영 직전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휠체어에 의지해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이후 병마와 싸워왔다.    realpaper7@newsis.com

 오시마 감독은 1970년대 들어 정치적 문제보다 개인의 도덕과 성애의 문제에 주력하면서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랐다. 1976년 칸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상영된 '감각의 제국'은 여인숙에 틀어박혀 섹스에만 몰두하던 남녀의 파국을 통해 군국주의가 팽배한 1930년대 중반 일본사회를 지적했다.

 이 영화로 인해 재판을 받기도 했으나 칸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들으며 시카고 국제영화제 특별상, 영국 영화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2년 뒤 다시 한번 섹스와 범죄를 다룬 '열정의 제국'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따냈다.

 1983년에는 영국 영화배우 겸 가수 데이비드 보위(66), 일본 영화감독 겸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66), 일본 뉴웨이브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61) 등 호화 캐스팅을 내세운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발표했다. 일본인의 서양인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애증과 동성애를 다루면서 호평을 얻었다.

 1987년 '막스 내사랑' 이후 12년 만인 1999년 내놓은 사무라이 영화 '고하토' 촬영 직전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휠체어에 의지해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이후 병마와 싸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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