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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아이즈]이슈진단 '다시 고개드는 한국 핵무장론'-박정희 집요하게 추진했지만 미국 압력으로 꿈 접어

등록 2013.04.08 14:54:41수정 2016.12.28 07: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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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북한 3차 핵실험장 위치 (그래픽=윤정아 기자) yoonja@newsis.com

【서울=뉴시스】이득수 기자 =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전쟁에서 사용된 것이다. 사흘 후인 9일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일본은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됐다.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폭탄은 우라늄 농축 원폭이었고, 나가사키를 공격한 폭탄은 플루토늄 원폭이었다.

◇최초 원폭 제조에 나선 국가는 일본

 원자폭탄은 미국이 최초로 사용했지만, 6개월만 늦었어도 일본이 먼저 개발해 태평양전쟁의 양상이 뒤집어질 뻔했다. 원자력에 대해서는 독일이 한 수 위였다. 단지 승전을 자신한 히틀러는 원자탄 개발 대신 잠수함과 군함의 동력원으로 개발하는데 주력했고, 원폭의 필요성을 인식했을 때는 너무 늦어 개발하지 못했을 뿐이다. 독일의 우수한 물리학자들이 유태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것은 미국이 먼저 원자탄을 개발하는 힘이 됐다.

 일본은 세계 정상급 수준인 물리화학자들을 동원해 비밀리에 원자폭탄(일본 독일은 ‘우란폭탄’으로 불렀다) 개발을 진행했다. 1941년 4월이다. 미국의 원자탄 계획인 맨하탄 프로젝트가 인가된(41년 12월6일) 날보다 8개월이나 빨랐다. 세계 최초였다.

 참여한 일본 학자들은 페르미 러더포드 하이젠베르크 채드윅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등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과 함께 공부했던 세계의 일류급들이었다. 일본의 노벨상 1호인 유카와 히데키도 그 일원이었다. 우라늄 원광석에서 핵폭탄 원료인 U-235를 분리해 농축하는 장치인 원심분리기도 일본 물리학자가 고안해냈고 자체 제작까지 했다. 본토 폭격으로 인한 잦은 정전과 필수시설 파괴로 원자탄 개발에는 끝내 실패했다. 전후 일본은 원폭 피해만 강조할 뿐 원자탄 개발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은 줄곧 부인해왔다.

◇한국의 핵개발 시동

 이승만 대통령은 2차대전을 종결시킨 원자력의 가공할 위력에 주목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12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UN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정책을 발표했다. 전력시설이 거의 전파된 한국은 원자력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 대통령은 1955년 미국과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고, 극히 어려운 경제 형편에도 과학자들을 미국 등 해외에  꾸준히 파견해 실무훈련을 받게 했다. 1957년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IAEA에 창설국가로 가입했고 1958년 3월11일 원자력법을 제정해 공포했으며, 대통령 직속의 원자력원을 발족시키고 그 산하에 원자력위원회와 원자력연구소를 설치했다.

 1959년 7월14일에는 미국이 절반을 부담한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로 TRIGA Mark-Ⅱ 기공식이 열렸다. 이 연구용 원자로는 3년 후인 1962년 3월30일 준공식을 가졌다. 이승만 정부는 4.19로 무너졌지만 원자력이라는 희망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집념

 민생고 해결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추진하는 데는 절대적으로 전력이 부족했다. 에너지부존 자원도 부족한 한국은 필연적으로 원자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1968년 원자력발전추진위원회가 원전 계획을 수립 70년대 중반까지 원전 2기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 최초의 원전인 고리1호기는 78년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주변의 국제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미국은 1969년 월남전에서 발을 빼기 위한 전제 조치로 아시아 지역의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어 1970년엔 주한미군 제7사단 철수가 있었다. 제7사단이 철수함으로써 155마일 휴전선 경비는 한국군이 전담하게 됐다.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의 필수인 핵재처리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1973년 프랑스와 원자력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캐나다와는 캔두형 중수로와 플루토늄 획득을 보장하는 NRX연구용원자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의 핵개발이 심각하게 진행되자 미국은 즉각 안보조약 폐기, 미군철수, 원전 및 경제 지원 중단 등으로 한국을 압박해 핵개발 포기토록 했다. 후발 약소국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1977년 조지아주의 땅콩농장 출신인 촌뜨기 카터가 대통령이 되고 인권을 내세워 주한미군 제2사단과 전술핵무기 일부 철수를 발표하자 박정희는 핵 카드를 다시 꺼냈다. 1979년에는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한 열중성자 시험시설의 상세설계까지 완성하는 등 “핵무기 개발 준비가 100% 끝났다”고 호언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휘소 박사의 ‘슬픈 전설’

 이 과정에서 재미 물리학자 고 이휘소(1935~1977) 박사의 전설적인 에피소드가 탄생했다.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은 당대 최고의 핵물리학자로 인정받고 미국 최고의 핵물리 연구소인 페르미연구소를 이끌었던 이 박사는 조국의 핵개발을 은밀히 지원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박사는 경기고와 서울대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스물여섯에 박사, 스물여덟에 교수가 됐고, 138편의 논문을 썼다. 30대 초반에 ‘20세기 전반은 아인슈타인, 후반은 이휘소가 핵을 지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인슈타인이 근무했던 프린스턴연구소는 이휘소의 이론핵물리학 수준이 아인슈타인을 넘어섰다고 평했다.

 1977년 4월 일본에 왔을 때 몰래 청와대에 와서 박정희에게 원폭 설계도를 전해줬다는 설이 한국에서는 신화처럼 전해온다. 그 직후 이 박사는 일리노이주 남부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국익을 위해선 못할 짓이 없다’는 미국 정보기관의 소행이라는 설에서부터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많은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었다. 로버트 킴은 한국을 돕다 스파이혐의로 옥살이를 했는데, 불세출의 천재 이 박사는 목숨까지 바쳤다. 뒤집어서 보면 박정희의 핵개발 욕심이 한국이 낳은 노벨상 수상자(거의 확정), 인류적 인재를 희생시킨 것이기도 하다.

 핵무기 개발의 꿈은 이뤄지기 직전, 1979년 10월26일 궁정동에서의 총성은 모든 것을 쓸어갔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미국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대신 ‘비분리처리’ 방식의 핵연료 기술 자립을 추진했지만 미국의 막무가내식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노태우 정부는 나아가 평화적 핵개발 권리 포기까지 얌전히 받아 들였다. ‘물태우’란 별명으로 유명한 노태우는 한반도비핵화선언을 해 핵개발 주권을 스스로 내던졌다.  

 한편 요즘 핵무장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주장을 펼친 정치인은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이다. 정 의원은 북한의 3차 핵실험 다음날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북한이 핵무장을 하면 우리도 최소한의 자위력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국에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20일 회의에서는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는 것에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우리 나름의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공간을 달라고 미국에게 당당하게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핵개발 주권을 요구하라’는 주문이다. 정 의원은 북한의 3차 핵실험 직후에 자신이 설립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세계적 핵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핵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58년에 달한다. 남한과 같은 해인 1955년에 시작됐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휴전 2년 만에 소련과 과학기술협조협정을 맺고 원자 및 핵물리학연구소를 창설했으며 이듬해부터 물리학자 30여명을 소련에 보내 연수시켰다. 1959년에 소련과 ‘조소 원자력 평화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고 이를 근거로 영변에 원자력연구기지 건설을 진행했다.

 1962년에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설치했고 1965년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 영변에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해 1967년부터 가동했다. 1962년 쿠바사태 이후 김일성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해왔다. 북한이 미국의 공격을 받으면 쿠바처럼 소련이 손을 뗄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실태는 89년 국제사회에 드러나 IAEA사찰을 받았지만 엉터리로 진행되다 유야무야 됐다. 1993년 3월12일 NPT탈퇴를 선언, 94년 6월13일 IAEA(국제원자력기구)탈퇴선언, 2002년 10월4일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시인 등 수순을 밟으며 유유히 핵무기 개발을 계속해왔다.

 미국과 한국은 20여년 간 북한의 장단에 놀아나 6자회담이니 중유제공이니 경수로 제공이니 온갖 ‘쌩쇼’를 벌였지만 결국 2006년10월9일, 2009년 5월25일, 2013년 2월12일 3차례 핵실험과 수차례의 ICBM 발사를 성공시키며 북한은 사실상의 핵무기 보유국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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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322호(4월9일~15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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