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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야기⑨]'초밥에 밥알이 몇개요?' 신라호텔의 탄생

등록 2013.07.06 22:00:59수정 2016.12.28 07: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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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삼성의 전자 산업이 이제 막 흑자로 전환하고 제자리를 잡아가던 1973년. 어느 날 한 정부 관계자가 찾아왔다.

 “이 회장님, 새로운 사업 하나 해보시지요.”

 정부 관계자는 큰 인심을 쓰듯이 말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떠안으라는 것일까?’

 기업을 하면서 그동안 수도 없이 겪어온 일이었다. 물론 이병철 회장은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왔고 앞으로도 그럴 참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국가의 이름으로 무리하게 들이미는 일들도 적지 않았던 터라 달갑지만은 않았다.

 “저야 늘 새로운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건 회장님이 분명히 크게 성공시킬 일입니다.”

 “….”

 “정말입니다. 회장님이니까 특별히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무슨 일인지 먼저 말씀해주십시오.”

 머쓱해진 상대는 대뜸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영빈관을 사시죠.”

 “영빈관을요?”

 영빈관은 서울 장충동에 있는 국빈 전용 숙소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빈들을 모시기 위해 짓기 시작했다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쳐 7년 만에 어렵게 완공한 국내 유일의 특급 숙소였다.

 1973년 당시 우리나라는 급속도로 공업화가 이루어진 데 반해 서비스 산업은 아직 눈조차 뜨지 못했다.

 이병철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정부로부터 영빈관을 구입해서 운영하는 한편 호텔 경영을 계획했다. 호텔 부지는 영빈관이 있는 남산 기슭으로 정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은 홍콩이나 고베, 마닐라의 화려한 야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

 그는 직접 부지를 둘러보고 만족했다. 정부 요청에 의해 시작한 일이기는 했지만 호텔 사업은 이병철 회장에게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눈길 위를 걸을 때의 설렘과 흥분을 안겨주었다.

 “시설, 서비스, 요리 어느 것 하나도 세계 일류 호텔에 뒤져서는 안 됩니다.”

 이병철 회장이 호텔에 대해 기본적으로 갖는 생각은 늘 그랬듯이 ‘최고’, ‘일류’였다. 그런데 사업을 구체적으로 그리면 그릴수록, 최신식 시설과 설계 등을 포함한 기획안을 보면 볼수록 무언가 빠진 듯했다.

 ‘빠졌어, 정말 중요한 무엇이….’

 그러다가 머릿속에 ‘오쿠라호텔’이 스쳤다. 그는 늘 신년을 그곳에서 하얀 눈을 보며 맞이했다.

 ‘거꾸로 내가 오쿠라호텔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오쿠라호텔의 외관과 내부 시설은 일부는 서양식이었지만 현관에 들어서면 어떤 사람이든 일본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일본식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 건설 회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혹시 오쿠라호텔의 노다 회장님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실 수 있습니까?”

 건설 회사 대표의 주선으로 그는 오쿠라호텔의 노다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호텔 로비는 헤이안 시대(794년~1192년)의 문화를 그대로 재현해서 고대 일본의 문화적 정취가 감돌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노다 회장은 흔쾌히 호텔 경영에 대한 노하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충고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호텔을 세우신다면 외양적인 아름다움을 내부로 응집해야 합니다. 한국의 전통미와 예술이 짙게 배어 있어야 외국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무릎을 쳤다.

 ‘그렇다! 무조건 최신식으로 짓는다고 여행객들이 좋아할 리 없다. 세계 어디를 가든 그 나라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여행자들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한국에 돌아와 이병철 회장이 지은 호텔 이름은 신라호텔!

 신라는 3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나라를 하나로 통일해서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다. 신라호텔도 그런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이병철 회장은 가장 화려하고 예술적인 호텔을 지어 국빈은 물론이고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관광객들에게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설계를 할 때에도 수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러나 문제가 또 있었다. 고객을 맞이하는 예절과 요리사의 실력 등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었다. 이제 막 먹고 사는 걱정을 던 한국 사람들에게 ‘서비스’라는 개념은 너무나 어려웠다.

 오쿠라호텔만 해도 호텔 서비스와 경영 노하우에 대한 1400여 가지의 내규를 갖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는 호텔을 원하는 시간에 열 수 없어. 아니, 열어도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선보일 수 없다.’

 고민하던 이병철 회장은 다시 노다 회장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회장님, 우리 신라호텔은 오쿠라호텔과 제휴를 하고 싶습니다.”

 “제휴요? 그것이….”

 “망설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동안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저희 오쿠라호텔과 제휴를 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거절해왔지요.”

 “그럼 저희가 짓고 있는 호텔에 한번 와보시고 결정을 하시지요.”

 노다 회장은 한국을 직접 방문해 신라호텔의 필요성과 장래성, 신용도를 직접 조사했다. 그러는 동안 노다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열정에 감동하고 말았다.

 “조건은 훌륭합니다. 그런데 사업적인 조건보다도 회장님 열정에 제가 졌습니다. 신라호텔이 세계 최고의 호텔이 될 수 있도록 힘껏 돕겠습니다.”

  신라호텔은 1973년 가을, 지상 23층, 지하 3층의 규모로 착공했다. 그런데 신라의 우아한 품위와 향기를 재현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가 이병철 회장의 열정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더니만 암초를 만나고 말았다.

 바로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든 제1차 오일쇼크였다.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과 친하게 지내는 나라에는 석유를 공급하지 않겠다면서 석유 공급량을 점점 줄여나갔다. 석유값이 치솟자 경제 위기가 닥쳐왔다.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도 없었다. 호텔을 짓기 위한 자재와 인력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만 하면 꼭 이렇게 난관이 닥치니 미치겠습니다.”

 회의 시작 전. 임원들끼리 넋을 놓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동안 숱한 어려움들을 겪어내며 쌓은 내공 덕분이었을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이 잘되면 오히려 불행을 각오해야지요. 기쁨 뒤에는 반드시 슬픔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일단 기다립시다.”

 이병철 회장은 함께 어려움을 견뎌내자고 임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떫은 감도 정성을 들이면 단감이 됩니다. 반대로 급히 서두르거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감은 달지가 않아요. 단감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합시다.”

 3년이란 세월이 성과 없이 흘러가버렸고, 일시 중단했던 공사는 1976년에야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중동 건설의 성황을 타고 국내에서는 건축 기술자들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오일쇼크를 버텨내고 나서 이제 숨통이 트이나 했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래도 이병철 회장은 건설 공사 상황에 대해 철저하게 보고받고 독려했다.

 “한국의 얼굴입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처음 세운 뜻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던 중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 이병철 회장이 위암 선고를 받았다. 가족과 삼성 직원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지금껏 평정을 유지하며 살아온 이병철 회장도 죽음 앞에서만큼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내가 죽을 수도 있구나. 죽음을 맞기에는 너무 이르다. 10년만, 10년만 더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해 가을 이병철 회장은 수술대에 올랐다. 수많은 생각을 했지만, 막상 수술실에 들어갈 때에는 초연했다.

 “본인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수술을 받는 사람은 100명 중에서 다섯 명밖에 안 됩니다. 회장님은 그중 다섯 명에 속합니다. 그런데 참 평온한 얼굴이시네요.”

 집도의의 말에 이병철 회장은 엷은 미소만 띠었다.

 ‘사람 목숨이란 하늘에 달린 것, 잘못된다고 해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세상을 뜨는 것뿐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늘에 맡기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안팎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1979년 3월 신라호텔이 문을 열었다. 착공한 지 6년 만이었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남산기슭에 있는 신라호텔을 보려고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신라호텔을 둘러본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호텔다운 호텔이 생겼다며 기뻐했다.

 신라호텔은 현관 지붕에 청기와를 얹어 영빈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부에도 우리나라의 전통미가 곳곳에 살아 있었다. 로비, 커피숍, 라운지, 객실 등은 일월도, 장생도, 봉황도, 봉덕사 범종의 문양, 꽃격자 무늬 등을 활용해 꾸몄다. 대형 샹들리에의 금속 장식은 신라왕 금띠 모양을 그대로 본떠 투숙객들에게 마치 신라 왕궁의 주인이 된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녹색의 나무들을 보면서 계절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꾸민 정원은 신라호텔의 가장 큰 매력으로 보는 이들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신라호텔 내부는 700여 개의 객실과 동양·서양·한국식으로 꾸며진 식당, 10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 회의실을 구비했다. 또 영어를 비롯해 6개국의 언어를 동시에 통역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해 외국 귀빈들을 맞이할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이병철 회장이 처음 구상했던 그대로 입이 벌어질만한 일류 호텔이었다.

 “이 회장, 정말 멋진 호텔입니다.”

 오쿠라호텔의 노다 회장도 감탄하며 이병철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건립 모토를 ‘호텔의 모든 문화를 바꾼다’로 삼은 신라호텔은 외관뿐 아니라 제공하는 서비스 수준 역시 최고였다. 문고리 하나까지도 챙기는 이병철 회장의 완벽주의 덕분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신라호텔이 모든 호텔 중에서 최고이기를 원했다. 특히 신라호텔의 조리부장은 틈만 나면 연수를 떠나야 했다. 그는 30대라는 젊은 나이에 모든 음식을 책임지는 조리부장에 올랐을 정도로 실력자였다.

 특히 일식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오쿠라호텔 일식당을 비롯해 가락 국숫집, 메밀국숫집, 복집에서 당대 최고의 요리사로부터 수십 차례에 걸쳐 비법을 전수받은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이병철 회장은 조리부장을 틈만 나면 연수를 보냈다. 일본의 한 초밥집에는 다섯 번이나 다녀오기도 했다.

 조리부장은 솔직히 그런 이병철 회장의 처사가 못마땅했다. 주방 식구들에게 가끔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회장님이 초밥을 좋아하니까 그러시는 것 아닌가요? 그 초밥집이 60년 전통을 가지고 있다면서요?”

 “그래봐야 몇 평 되지 않는 초라한 구멍가게예요. 솔직히 호텔 조리부장인 내가 그곳에서, 그것도 몇 번이나 들러 배울 것이 뭐가 있겠어요?”

 그는 마음속으로 벼르고는 했다.

 ‘회장님, 저는 이미 최고입니다. 언젠가 제 진가를 한번 보여드리죠!’

 그러던 중 마침 이병철 회장이 삼성그룹 중역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에 들렀다. 조리부장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초밥을 만들었다.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된 초밥을 보여드리고 말겠어.’

 조리부장이 이병철 앞에 초밥을 내놓고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병철 회장은 미식가였다. 그러나 결코 과식하는 법은 없었다. 초밥을 좋아했지만 기분 좋을 땐 여덟 개, 언짢을 땐 여섯 개만 먹었다.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놓인 초밥을 천천히 음미하던 그가 조리부장에게 물었다.

 “연수는 잘 다녀왔습니까?”

 “예, 회장님.”

 “초밥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까?”

 조리부장은 이때다 생각하고 그동안 익힌 지식을 술술 풀어놓았다.

 “그럼요. 밥 무게와 생선 무게를 15그램으로 같게 하고, 온도는….”

 조리부장의 말은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다. 이병철은 조용히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배울 것도 없습니다. 회장님!’

 조리부장은 한껏 의기양양해져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조리부장이 맛이 어떠냐고 물으려던 찰나, 이병철 회장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초밥 한 점에 밥알은 몇 알입니까?”

 “네… 네?”

 이병철 회장이 답을 듣기 위해 그를 쳐다보았다. 조리부장은 숨이 가빠지고 땀까지 배어나왔다. 이병철 회장은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눈빛, 손짓 하나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 “회장님의 작은 몸짓은 백 마디 말보다 더 무섭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조리부장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래, 그만큼 다녀왔으면 이 정도는 알아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조리부장이 백기를 흔드는데도 이병철은 여전히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세보겠습니다.”

 당장 초밥을 물에 풀어헤치고 밥알을 한 톨 한 톨 셌다. 조리부장은 그룹의 총수 앞이라 집중하기가 어려웠지만 가까스로 셈을 마쳤다.

 “320알입니다.”

 막상 세고 나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까짓 밥알 수가 뭐 그리 대단한가? 그걸 아는 요리사가 어디 있겠어?’

 그런데 조리부장의 마음속 외침을 듣기라도 한 듯 이병철 회장이 말을 이었다.

 “낮에는 밥으로 먹기 때문에 초밥 한 점에 320알이 있지요. 하지만 저녁에는 술안주로 먹기 좋게 280알 정도가 있어야 정석입니다.”

 최고라고 자부하던 조리부장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요리에 장인 정신을 가지고, 어떤 일을 맡든 간에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고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에 자신의 이름을 거는 일, 그것이 일류가 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조리부장은 이후 절대 자만하지 않고 늘 배운다는 자세, 그리하여 최고가 되겠다는 자세를 잊지 않았다.

 신라호텔은 삼성의 다른 사업들에 비해 수익을 많이 남기는 분야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이 목표했던 대로 사람들에게 호텔은 잠자는 숙소가 아니라 일종의 예술 작품이요, 문화 서비스라는 개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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