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열차 강도 사건'의 '소설적' 강도 84세로 사망

빅스는 우편 열차 현금 강탈에 참여한 것보다 체포 이후의 소설 같은 여정 때문에 영국에서 명성을 얻었다.
체포된 그는 원즈워츠 감옥에서 탈옥했고 재주좋게 여러 나라를 거쳐 결국 브라질로 도망쳤다. 거기서도 여러 행운을 만나 영국 사법망을 피하면서 대놓고 떳떳하게 살던 그는 35년 후인 2001년 제발로 영국에 돌아와 수감됐다.
빅스는 12명으로 이뤄진 갱단 일원으로 1963년 8월8일 새벽 글래스고우-런던 행 국립우편 열차를 강제 약탈했는데 시그널을 몰래 바꿔 기관사로 하여금 한밤에 열차를 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강도들은 260만 파운드 상당의 지폐가 든 행낭 125개를 털었다. 당시 미화 730만 달러 상당의 이 약탈품은 현 시가로 5000만 달러에 달한다. 해서 이 범죄는 "세기의 강도"로 불려졌다.
갱의 대부분은 체포돼 장기형을 받아 수감됐다. 빅스는 30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15개월 뒤 그는 런던 형무소에서 로프로 짠 사다리로 벽을 타고 넘어 기다리고 있던 가구 트럭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부터 법보다 항시 한 발 앞서는 뻔뻔한 그러나 매력적인 악당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랑스로 도망간 빅스는 이어 호주, 파나마에 이어 1970년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 도착했다. 그때는 도망 생활과 얼굴 성형 수술을 하느라 강도로 번 돈 대부분을 써버렸다고 한다.
브라질에서 그는 악명을 상품화 해 생활비를 벌고 살아갔다. 돈을 받고서 기자들은 물론 관광객들에게 강도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었으며 "리우에 가서 로니 빅스를 만났네…진짜"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티셔츠를 팔았다.
그는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스와 함께 음반을 취입했으며 "빠져나온 이상한 사람"이라는 회고록도 썼다. 심지어 "도둑을 불러라"라고 씌여진 가정 경보 시스템을 팔기도 했다.
빅스는 강제로 그를 추방하고, 본국 송환하고 심지어 납치해서 데려가려는 여러 시도를 물리쳐 한층 유명해졌다. 영국 형사가 1974년 그를 추적하고 브라질에 왔으나 브라질과의 범인인도 조약이 안 된 상황이 그를 살렸다. 브라질 쿠데타 군부 정권이 그를 추방하려고 하자, 빅스는 브라질 여성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내밀어 축출을 저지했다.
1981년 기자라고 칭한 두 사람이 빅스를 리우의 한 식당에서 붙잡아, 재갈을 물린 뒤 더블 백에다 집어 넣고 비행기에 태워서 아마존강 항구 도시 벨렘으로 납치했다. 거기서 이들은 바베이도스까지 배를 타고 갔는데 빅스를 넘기고 그 이야기를 영국의 인기 타블로이드 신문에 팔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베이도스 역시 영국과 범인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상태라 그는 다시 리우로 보내졌다.

귀국해봤자 감옥 독방뿐일 것이라며 영국으로 갈 생각이 없다고 말해 오던 빅스는 이후 몇 년 새 중풍 등으로 건강이 나빠지자 영국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타블로이드 선이 그의 귀국을 주선해 개인 제트기를 전세내 빅스를 2001년 영국으로 데리고 왔다. 비행기 안에서 런던 경시청의 존 콜스 국장이 "이제 정식으로 체포한다"는 말과 함께 빅스에 수갑을 채웠다.
즉시 수감된 빅스는 10년 채 못된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감옥에서 나오는 그에게서는 날렵한 "신사 도둑"의 면모는 찾기 어려웠다.
변호인들이 건강을 이유로 그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당시 잭 스트로 법무장관이 "전혀 개전의 정이 없다"며 반대했고, 강도들에게 철봉으로 머리를 얻어 맞은 기관사 잭 밀스가 영 회복되지 않는 것에 기관사 노조가 빅스의 석방 불가를 로비해 풀려나지 못했다.
그러나 병이 깊다고 판단한 당국에 의해 빅스는 2009년 8월7일, 80회 생일 전날 석방됐다. 이후 그는 양로원에서 살았다.
영국 언론은 죽을 때까지 빅스에게 매료됐다. 그의 사망일은 우연찮게도 오래전부터 기획된 빅스 사건에 관한 BBC 텔레비젼 쇼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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