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염혜란과 제로의 상태
15일 개봉 영화 '내 이름은' 정순 역 맡아
정지영 감독 연출 제주4·3사건 다룬 작품
"감독의 진취에 나만이 가진 온기 넣었다"
"한국 어머니이면서 피해자 전형 안 되게"
"날 향한 칭찬들 모두 반만 들으려고 해"
"아주 이기적인 다면적 인간 연기하고파"
![[인터뷰]염혜란과 제로의 상태](https://img1.newsis.com/2026/04/15/NISI20260415_0002110990_web.jpg?rnd=20260415065157)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봄바람이 불어오면 경기를 하는 여자가 있다. 봄을 싫어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이유는 모른다. 추측하건대 통째로 삭제된 8살 이전 기억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들출 이유가 없으니 여자는 그저 약으로 버틴다. 하지만 삻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것으로 추측되고 50년 지난 현재까지 날 괴롭히는 것만 같은 그 기억을 계속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다. 대면해야 할 시간은 오기 마련이고, 그건 그의 남은 인생을 위한 필연이고 의무다.
늦둥이 고등학생 아들을 키우고, 한국무용을 가르치며, 한편 쿨하고 멋도 부릴 줄 아는 '정순'은 봄바람과 봄볕에 취약하다는 것만 빼면 평범한 여자. 그러나 과거가 하나 씩 드러날수록 그의 삶은 질곡으로 가득 차 있다. 말하자면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삶이다. 그곳엔 비극이 줄을 잇는다. 제주 4·3이 있고, 베트남전쟁이 있으며, 광주 5·18도 있다. 그리고 4·3은 고통의 원흉이다. 모든 사실을 복원해낸 정순은 통곡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정순은 사건이 벌어졌던 바로 그 장소에서 위무(慰舞)를 시작한다.
영화 '내 이름은'(4월15일 공개)의 정순. 그는 연기하기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직면하는 게 엄두가 나지 않는 인물이다. 어떤 배우가 자신있게 나설 수 있을까. 연출을 한 정지영 감독도 이걸 모르지 않았을 게다. 그래서 정 감독은 처음부터 이 배우를 콕 짚었다. 염혜란(50). 최근 각종 영화·드라마에서 깊은 인간성은 물론이고 넓은 캐릭터 스펙트럼까지 보여준 이 탁월한 배우는 이번에도 정 감독의 기대에 적중하는 연기를 한다. 너무 자주 쓰이는 표현이긴 하나 이 말을 또 할 수밖에 없다. 염혜란을 대체할 수 있는 배우가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 개봉을 앞두고 염혜란을 만났다. 그는 "감독님은 용기 있는 분이고 그의 영화는 진취적으로 나아간다. 나는 그런 감독님의 영화에 내 온기를 채워넣고 싶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감독님과 '소년들'에서 짧게 만났기 때문에 길게 한 번 더 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이 영화를 제안해주셨고, 큰 망설임 없이 결정했어요. 이 이야기가 감독님에겐 숙명이라고 느껴졌거든요. 저도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정순이 고통에 짓눌린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맘에 들었습니다."
염혜란은 정순이 한국 어머니의 상징이 되길 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피해자의 전형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고 했다. 이건 정 감독과 염혜란이 모두 동의한 부분이었다. 8살 이전 기억을 잃었다는 게 삶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상태는 아닌 사람, 다만 결국 고통의 역사를 마주하게 되는 사람, 정순이 현재 한국사람들과 다르지 않기를 원했다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너무 큰 고통에 짓눌려 있기에 관객에게 타자화 되는 게 아니라 관객이 정순에게 동질감을 느끼길 바란 것이다. 염혜란은 "그게 바로 이 캐릭터가 전형성을 탈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4·3의 복판에 있던 정순을 연기하기 위해 염혜란은 역시 공부해야 했다.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학회에서 공부를 하며 4·3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이번에 염혜란은 4·3에 관한 각종 자료를 다시 들여다봤다. "좋은 자료와 기록이 있어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그때를 겪은 이들의 증언과 그 증언이 담긴 육성이었다. "그 얘기들이, 그 목소리들이 제게 해주는 이야기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했던 겁니다."
![[인터뷰]염혜란과 제로의 상태](https://img1.newsis.com/2026/04/15/NISI20260415_0002110991_web.jpg?rnd=20260415065221)
제주 사투리는 염혜란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이었다. 그저 그럴싸한 사투리를 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 사투리에 제주의 특수성이 있고 제주의 정서가 있고 결국 그곳에 4·3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특유의 연기 스타일상 아마도 염혜란은 제주 방언을 완벽에 가깝게 구사할 수 있게 됐던 것 같다. 여기에 제동을 건 사람이 정 감독이었다. "감독님께선 자막을 쓰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최대한 많은 관객이 이 영화의 말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죠. 많은 대목을 오히려 표준어로 고쳐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주를 공부하고 나니 이곳이 이젠 그저 아름다운 섬이 아니라 가슴 아린 장소가 돼버렸네요."
절정에 오른 연기력 덕분에 어떤 장면도 어려워 하지 않았을 것만 같은 염혜란이지만 영화 말미 정순이 보리밭에서 춤추는 장면은 꽤나 고달픈 연기였다고 했다. 이 대목은 '내 이름은'의 하이라이트. 그 춤엔 몇 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는 마음들이 담겨 있어야 했는데, 정 감독은 합의된 몇 가지 동작을 빼곤 염혜란에게 마음 가는대로 움직이라고 요구했다. 염혜란은 "정말 화가 나는 디렉션이었다. 그렇게 연기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냐고 되물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몸에 춤이 밴 사람이라면 그게 되겠지만 전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 장면만 며칠 동안 찍었을 정도로 공을 들였습니다. 정말 온갖 마음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그 시기를 겪은 이들을 향한 위로이면서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이기도 하죠. 진혼이 돼야 하는 춤이고,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춤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과거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비난하고 벌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담긴 춤이 아니라 계속 미래로 나아가며 평화를 향해 가려는 마음이 담긴 춤이어야 했죠. "
현재 업계에서 염혜란은 강력한 연기력이 필요한 여성 캐릭터를 맡아줄 배우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언급된다. 그가 정순을 연기한 것은, 앞서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나 '어쩔수가없다'의 아라를 연기한 것은 염혜란이 언제나 기대 이상을 해내는 배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상 요즘 염혜란을 향한 대중의 말들은 칭찬 일색이다. 다만 그는 "좋은 말들을 절반만 들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전 칭찬도 비판도 딱 반 씩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평상심을 유지해보고 싶어요. 제 마음을 항상 0인 상태로 만들어놓고 싶거든요. 그 형태를 지향합니다. 물론 배우로서 주목 받고 싶었어요. 현재 배우로서 제 삶이 스스로 놀랍고 신기할 정도죠. 꿈도 꾸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니까요. 하지만 전 제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인지도 압니다. 전 그저 눈앞에 닥친 작품만 잘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내 이름은'은 역사를 가지고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다. 어떤 배우는 이런 작품이 가진 힘에 매료돼 유사한 시도를 몇 번이고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염혜란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을 연기하고 싶습니다.(웃음) 다면적이고 추악하기까지 한 인간을 연기하고 싶어요. 배우로서 저는 고착화된 모습으로 남을 생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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