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기억해야 할 전쟁사(16) '운산 전투'

16. 운산전투 (1950년 10월24일 ~ 11월1일) : 유엔의 오판과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
국군 제1사단은 1950년 10월24일 오전 11시 청천강을 건너 운산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오른쪽에 제15연대가, 왼쪽에는 12연대가 포진하면서 운산을 정면과 동쪽에서 동시공격할 계획이었다.
우선 15연대는 영변으로, 12연대는 구룡강 서쪽 용산동을 거점으로 삼아 운산으로 돌입하기로 됐다. 북한군의 저항으로 몇 차례 교전이 있었지만, 하루만에 모두 중간목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10월25일 운산공격이 시작됐다. 그런데 운산시내로 진입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1군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최종목표인 수풍댐으로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다 이날 1사단은 국군은 적과 교전중에 중공군 참전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날 포획한 중공군은 "운산 부근에 1만명, 희천 부근에 1만명이 있다"고 진술했다. 이에 1사단은 예비병력인 11연대까지 동원하는 총공세를 벌인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격은 불가능했다.
이 때 1사단 백선엽 준장은 상급자인 프랭크 W.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중공군 참전 등의 전황을 보고했으나 유엔군사령부의 반응은 미지근하기만 했다.
특히 미 제8군은 운산과 온정리에서 잡은 포로들을 심문까지 한 상황이었음에도 다르지 않았다. 미 8군은 "포로들은 중공군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북한군을 좀 더 증강하기 위한 징후" 정도로 해석하고 중공군 부대의 참전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유엔군사령부도 "중공군 부대가 진입했다는 정보는 없다"고 유엔에 보고했다.
당시 국군 제2군단은 온정리 등에서 중공군의 공격으로 부대가 와해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유엔군은 미 제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국군 제1사단을 추월 공격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전황을 극복하기 위해 파병된 미 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가 국군 제12연대와 작전지역을 교대하기 위해 북상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주일동안 중공군의 초기 공세를 막아내며, 이들 일부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유엔군사작전회의에서는 청천강 이남까지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어 유엔군사령부는 11월1일 오후 뒤늦게 북진중이던 모든 부대에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국군과 유엔군은 대부분의 장비를 두고 철수를 시작했다.
미 8기병연대는 후퇴 도중 중공군에 포위돼 많은 병력을 잃었다. 엄호를 맡은 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중공군에 무너지면서 후방이 차단된 탓이었다. 특히 3대대는 적진에 고립되는 위기를 맞았고, 미군은 이들의 구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3대대원 800명 중 약 530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이 사건은 미군 전사에서 '운산의 비극'으로 불릴 정도로 참담한 패배였다.
중공군은 병력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군해 구장동-영변-용산동 선까지 도달했다. 이제 유엔군의 최우선 목표는 중공군을 막기위해 전선을 재조정하는 일이 됐다. 청천강 연안으로 모든 병력을 집중하고 방어지연 전투태세로 전환을 시도한다.
한편 중공군은 이 전투로 미군의 전력을 평가해 '운선전투 평가'라는 팸플릿으로 제작했다. 예하부대에 하달한 이 자료에서 미군은 보병, 전차, 포병의 협동작전능력을 높히 평가했으나 '나약한 보병', '후방차단에 속수무책' 등으로 혹독하게 비평했다. 국군에 대해서도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며 비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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