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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겸 일본의 우리신불]백제 신들의 아스카베

등록 2012.05.02 08:01:00수정 2016.12.28 00:3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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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하도겸의 ‘일본 속 우리 신불(神佛)을 찾아서’ <4>  잊힌 백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20여 년 전만 해도 극히 적은 사료의 한계 탓에 백제는 그야말로 잊혀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출현과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발견 등으로 백제는 잊힌 나라가 아니다. 일본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역할은 지대했다. 신라·고구려·가야를 비롯해 특히 백제로부터 건너간 사람들 즉, 도래인의 뛰어난 선진 문화·기술은 일본 문화의 형성에도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일본인들 역시 인식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큐레이터 dogyeom.ha@gmail.com

【서울=뉴시스】하도겸의 ‘일본 속 우리 신불(神佛)을 찾아서’ <4>

 잊힌 백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20여 년 전만 해도 극히 적은 사료의 한계 탓에 백제는 그야말로 잊혀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출현과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발견 등으로 백제는 잊힌 나라가 아니다. 일본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역할은 지대했다. 신라·고구려·가야를 비롯해 특히 백제로부터 건너간 사람들 즉, 도래인의 뛰어난 선진 문화·기술은 일본 문화의 형성에도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일본인들 역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 가운데 광융사(廣隆寺)의 창립과 관련된 진씨(秦氏:하타우지)와 한씨(漢氏:아야우지)가 유명하다. 이들은 동족집단이나 혈연집단은 아니다. 각지로부터 온 사람들을 새롭게 편성해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물론 진씨는 진의 시황제의 후예, 한씨는 한의 영제(동한씨)나 헌제(서한씨)의 후예라고 칭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특히 백제로부터의 도래인이다. 물론 진씨는 신라계의 성향도 강하다.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무덤 즉 고분형태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분의 형태 변화는 거주민의 변화 또는 새로운 문화의 전래와 충격 등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죽음과 관련된 문화형태 역시 쉽게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장례 및 제사를 둘러싼 종교 문화다. 물론, 이 문화 역시 머나먼 외국에서 살다 보면 기나긴 세월 속에서 조금씩 변화돼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장례 및 제사 문화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종교나 신앙은 신사와 사찰의 그 창건자가 누구인지, 모셔진 신이 어떠한 신인가에 대한 기록 즉, 창건연기설화 등은 남는 법이다.

 오늘 찾아가볼 신사는 오사카가 있는 근기 지역의 근철(近鐵 : 긴테츠)전철 남대판선(南大阪線: 미나미오사카센)의 상태자(上の太子:카미노타이시)역에서 가까운 국도166호선 죽내가도(竹內街道:다케우치카이도)에 근접한 구릉 지대 포도밭 가운데 있다. 이 아스카베진자(飛鳥戶神社)는 명신대사(名神大社)로서 백제계 비조호조(飛鳥戶造:아스카베노 미야쓰코) 일족의 조상신인 백제 곤지왕(崑技王)인 비조대신(飛鳥大神)을 제사지내고 있다.

 여기서 아스카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나라의 아스카촌을 떠올린다. 그러나 여기서 아스카란 오사카의 하비키노시의 아스카다. 흔히들 치카츠 아스카라고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당시의 수도는 오사카의 나니와였다. 따라서 여기서 나라의 아스카는 멀지만 하비키노시는 가까우므로 가까운(치카츠) 아스카라고 불린 것이다.

 아스카에 자리 잡은 아스카베신사는 일본 고대 평안시대 초기에 곤지왕의 자손인 백제숙네(百濟宿禰 : 구다라노스쿠네)와 어춘조신(禦春朝臣 : 미하루노아손)등에 의해, 859년에 정 4위하(품)을 제수받았다. 880년에는 봄·가을의 제례비로서 지급되는 신령전(神領田)까지 받은 관사(官社) 즉, 정부에서 인정하는 신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명치시대(明治時代) 신사제도의 제정에 즈음해, 스사나오노미코토(素盞嗚命) 즉, 신라 명신을 제사지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후 1908년 4월 2일 우리의 서원철폐와 같이 촌락의 제사조직들의 통폐합에 대한 강요로 호정팔번궁(壺井八幡宮)에 합병됐다. 그러다 1952년에 다시 분사(分祀)돼 독립된 종교법인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사 일은 매년 10월 17일 이뤄지고 있다.

 아스카베신사로부터 서북으로 300m 정도 올라가면 도래인의 족장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 비조천총(飛鳥千塚)으로 불리는 고분들이 있다. 포도밭으로 개발됨에 따라 고분이 대부분 파괴됐다. 이 신사의 새 돌담도 1960년에 파괴된 고분 석실의 석재를 사용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고분군(古墳群) 가운데 겨우 한기가 제대로 남아있다. 이 고분은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에게도 알려진 관음총고분(觀音塚古墳)이다. 일본에서는 7세기가 되면서 이전과 또 다른 형식의 고분인 횡구식석곽(橫口式石槨)이 시작된다. 이는 곧 새로운 이주민이 왔다는 증거로 해석되는데 이러한 까닭에 이 고분이 곤지왕계의 도래인의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인용된 ‘백제신찬(百濟新撰)’에는 곤지왕이 도래한 연유를 기록하고 있다.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하자 웅략천왕(雄略天皇)이 축하의 뜻으로 아레나꼬(阿禮奴跪)를 보내면서 미녀를 하나 보내달라고 했다. 백제는 무니(慕尼)부인의 딸 이케츠히메(池津姬)를 보냈다. 천황은 그녀를 궁중으로 들이려고 했지만, 그녀가 그전에 다른 사람과 사통해 버린 사건이 터졌다. 천황은 격노해서 두 사람의 사지를 나무에 묶고는 판자 위에 올려 태워버렸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개로왕은 미안하게 여겨 다시는 여자를 보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남동생인 곤지에게 ‘네가 왜국에 가서 천황을 잘 보필하라'고 했다. 곤지왕은 ‘왜국에 부임하기 전에 왕이 총애하는 여성을 한 사람 주십시오’라고 하자 왕은 기이하게도 산달이 가까워져 온 임산부를 하사하면서 ‘만약 왜국으로 가는 도중에 출산하면 모자 모두 함께 배에 태워 빨리 보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실제로 일본으로 가는 도중 가라도(加羅島)에서 임산부가 출산하게 된다. 그러자 곤지왕은 약속대로 모자를 배에 태워 백제로 돌려보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도군(嶋君:세마키시)라고 불린 무녕왕(武寧王)이다. 이후 백제의 삼근왕이 서거하자 웅략천황은 곤지왕의 둘째 아들인 말다왕(末多王)이 어린데도 총명하다며 백제왕으로 삼고 병사 500인을 붙여 백제로 보냈다고 한다. 이가 바로 백제 24대 동성왕(東城王)이다”라며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사가 과연 사실인지는 불명하다. 또 곤지왕이 인질인 것인지 왜국에 상주시킨 백제외교관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정적인 동생을 제거하는 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곤지는 무령왕과 그 모후를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안전판으로 데리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삼근왕은 재위 3년 만에 서거하고,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두 사료가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의 사실을 전하고 있어 참고된다.

 한편, 제신을 ‘우두천왕(牛頭天王)’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우두천왕은 스사나오노미코토 즉, 신라명신으로 시코쿠 나루토시 신라신사에서 모신 신과 같다. 결국, 삼국의 신을 함께 제사지낸 교토 오사케 신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정착한 백제 사람들이 신라인들과 함께 한 지역에 살면서 결혼도 하며 상대방 신들도 모신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들이 화합하고 교류하면서 그들의 신들도 교류하게 된 것이다.(여성불교)

 국립민속박물관 큐레이터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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