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알렸더니 '피의자' 됐다…'보복성 역고소' 급증
등록 2026.10.25 08:00:00수정 2026.10.25 08:02:43
성폭력상담소 ‘보복성 역고소’ 13.8%
피해자 겨냥한 ‘선제 고소’ 전략 확산세

[서울=뉴시스] 신항섭 기자, 이은서 인턴기자 = "성폭행 피해보다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잠을 못 자요. 고소장을 받은 뒤로 제 말이 다 의심받는 것 같아서 매일이 버거워요."
서울의 한 대학생 A씨는 지난 2월 지인이던 B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학내 신고와 공론화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후 B씨로부터 명예훼손과 스토킹 혐의로 되레 고소를 당했다.
최근 중·고교와 대학가에서 성범죄 피해를 알리는 공론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해 혐의자 측이 맞고소로 대응하는 사례가 잇따른다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를 알리는 과정에서 법적 분쟁까지 겪으면서 피해자가 심리적·경제적 부담을 떠안는다는 것이다.
최근 보도된 예술계 고등학교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도 피해자 측이 고발과 공론화에 나선 뒤 가해 혐의자 측이 명예훼손 등으로 맞고소에 나서면서 수사가 장기화됐다.
그 사이 가해 혐의자가 별다른 제재 없이 국립대 진학 절차를 밟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법절차와 학내 피해자 보호 체계의 공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성폭력상담소 2024년 세부 상담 통계에 따르면, 강간 외 중복피해 상담 중 '보복성 역고소'는 13.8%로 전체 유형 중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무고·명예훼손·손해배상·스토킹 등 실제 고소 사례가 10% 이상을 차지했고 역고소 위협도 3.3%로 집계됐다.
2017년 미투 운동 당시 무고·명예훼손 등으로 이어진 중복피해가 5% 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7년 만에 두 배 넘게 늘어난 수치다.
역고소의 양상도 다양해지고 있다는 게 현장 설명이다. 과거에는 성범죄 혐의에 대해 불송치나 불기소 처분이 나온 뒤 무고죄로 고소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면, 최근에는 명예훼손·모욕·위증·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나 손해배상 청구 등으로 다양해지는 추세다.
법조계에서도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 사건을 담당하는 변호사들은 피해자가 법적 대응을 준비하는 단계부터 맞고소를 당하거나 피해 사실을 알린 뒤 별도의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심지연 법무법인 심앤이 성범죄피해자전담센터 변호사는 "과거에는 불송치나 불기소 처분이 난 뒤에야 가해자가 무고죄로 고소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최근 6개월에서 1년 사이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이어 "성범죄 피해자가 명예훼손 등 피의자 신분으로 법률 상담을 찾는 사례도 급증했다"며 "성범죄 가해자 측을 주로 전담하는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맞고소와 선제 고소를 적극 추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덧붙였다.
피해자가 사과를 요구하며 가해자에게 보낸 메시지나 상대방에게 연락한 과정을 근거로 스토킹처벌법 위반, 협박, 명예훼손 등을 내세워 먼저 고소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는 데 더해 맞고소 사건까지 방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심 변호사는 "선제 고소를 당하면 사건이 공론화돼도 일방적 피해자가 아닌 '쌍방' 공방의 당사자로 비치기 쉽다"며 "고소 동기가 불투명해지면 피해자의 방어권이 심각하게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가 사법 절차에 앞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대학 인권센터 역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사권이 없고 겸직 인력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신속하고 실효성 있는 대응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 대학 인권센터에서 중징계가 내려지는 비율은 10% 미만이며, 조치도 '접근금지 권고' 등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조사를 거쳐 최종 결정이 나오기까지 수개월 이상이 걸리기도 하지만, 센터의 결정만으로 상대의 행동을 강제하기는 어렵다.
이런 한계 탓에 일부 피해자가 학교별 피해자 연대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론화 같은 사적 구제 수단에 의존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맞고소 자체를 모두 피해자 입막음 수단으로 볼 수는 없으며 제도적 한계와 개별 사건의 정당한 법적 대응 여부를 구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을 지낸 박찬성 변호사는 "성폭력 맞대응은 과거에도 존재했다"며 "진짜 문제는 사법기관이나 학내 절차에서 '혐의 없음' 결론이 났는데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명예훼손 등으로 같은 문제를 반복해 제기하는 사례가 늘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도의 결함과 개인적 불복을 냉정하게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맞고소와 당사자 간 불복·불신이 얽힌 문제를 풀려면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심 변호사는 "성범죄 공론화 직후 제기되는 역고소가 피해자의 입을 막기 위한 '전략적 봉쇄소송(SLAPP)'인지 가려낼 수 있는 정교한 수사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며 "피해자가 사건 자체 외에 추가적인 2차 피해를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평등가족부 관계자는 "성폭력상담소와 보호시설 등 유관 기관을 통해 늘어난 역고소 피해 상담 내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다"며 "역고소 피해자를 위한 무료 법률 지원과 심리 회복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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