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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받던 키르기스탄 수도에 부유한 러 청년들 득시글

등록 2022.10.06 12:45:39수정 2022.10.06 13: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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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수도 키슈케크의 러 피난민 공동체 르포

징집 회피한 고학력·좋은 직업 출신이 대부분

반전 분위기 약해…돈벌이·숙소·적응에만 관심

[서울=뉴시스]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고르키 광장에서 반 우크라이나 전쟁 시위를 벌이는 장면. 시위에 참가한 온두루슈 톡토나시로프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시위 장면에 징집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한 러시아 청년도 가담했다. 그러나 20만명이 넘는 피신 러시아 청년들은 대부분 우크라이나 전쟁에 큰 관심이 없다. (출처 24.kg 홈페이지) 2022.10.3.

[서울=뉴시스]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고르키 광장에서 반 우크라이나 전쟁 시위를 벌이는 장면. 시위에 참가한 온두루슈 톡토나시로프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시위 장면에 징집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한 러시아 청년도 가담했다. 그러나 20만명이 넘는 피신 러시아 청년들은 대부분 우크라이나 전쟁에 큰 관심이 없다. (출처 24.kg 홈페이지) 2022.10.3.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지도상에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던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길거리에 징집을 피해 피난온 러시아 청년들이 가득하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NYT는 비슈케프 현지 표정을 전하는 르포기사에서 먼지 풀풀나는 시가지를 아무런 할 일이 없는 러시아 청년들이 할 일없이 떠돌고 있다고 전했다.

임대료는 치솟고 고급 호텔이든 싸구려 숙박업소든 빈 방은 없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여러 곳에서 보수가 높은 일자리를 버리고 피난 온 수만명의 러시아 청년들이 비행기, 버스, 승요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온다.

러시아에 저임 노동자를 공급하는 낙후한 나라로 멸시받는 키르기스스탄이 많고 교육수준이 높은 러시아 청년들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공연기획자였던 데니스가 지난달 30일 비슈케크의 한 술집에서 다른 러시아 청년들에게 어느 숙소가 좋은 지를 묻고 있었다. "매일 하늘을 보면서 탈출할 수 있게 해줘 감사하다고 기도한다"는 그는 이곳 영주권을 신청하고 일자를 찾고 있다. 술집에서는 "러시아 공동체"가 발족한 것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중앙아시아 각국 및 아르메니아, 조지아, 튀르키예 등지에 이처럼 많은 인구가 유입된 것은 1917년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부터 시작된 탈출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부분 동원령"을 발표한 지난달 21일부터 급증했다. 러시아 노바야 가제타지는 4일 동안 징집연령 남성 26만1000명이 피신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 뒤에도 수만명이 더 탈출했다.

이번의 탈출 행렬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피난 행렬과는 정반대 풍경이다. 폴란드 등 유럽국으로 피난한 우크라이나 여성과 아동들과 달리 러시아 남성들이 침략군이 아닌 징집을 피해 탈출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이민자들과도 다르다.

러시아 극동지역 대학생이던 23살의 알렉산데르는 "처음엔 직업 군인과 가족들만 참전할 것이라고 했는데 동원령이 내려져 모두가 끌려가게 됐다"며 "감옥에 갈지 군대에 갈지"의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비슈케크 술집에선 아무도 우크라이나 4개 지역 합병을 선언하는 푸틴의 연설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시베리아 출신 화가인 유리(36)는 "거짓말만 한다"고 했다. 유리는 지난 주 3일 동안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가며 비슈케크로 왔다. 그는 미국 헤비 메탈 그룹의 앨범 표지를 디자인하는 등 외국 고객을 상대로 사업을 해왔다. 현재는 한방에 러시아인 19명이 묶는 호스텔의 침대 윗칸에서 지낸다. "이곳에선 안전하다"고 했다.

사할린섬에서 수학 교사를 하던 엘다르(23)는 전쟁에 동조하는 러시아 국민들을 비난했다. 그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파에 앉아서 푸틴이 벌인 일이 갈수록 나빠지는 걸 지켜만 보고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앞 날을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지난 7개월 동안 이어진 고통과 유혈극을 견뎌온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이제서야 우크라이나 전쟁을 우려한다며 화를 내지만 여전히 탈출한 러시아인들조차 대부분 전쟁은 언급하지 않고 숙도와 돈벌이,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같은 사소한 것들에만 관심을 같는다.

러시아인에게 천대받다가 입장이 바뀐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사디르 자파로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은 "전에 없던 일"이라면서 "러시아 시민들은 언제든 이곳에 올수 있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 추방을 겁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는 징집 회피자가 얼마나 왔는지 모른다면서도 이들이 나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들 덕분에 집세가 두세배 올라 키르기스스탄 주민들이 쫓겨나는 상황이지만 "실보다 득이 훨씬 크다"고 했다. 키르기스스탄에 온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교육수준이 높고 좋은 직업을 가졌던 기술자나 예술인들이다.

돈이 많은 사람도 있고 급히 나오느라 옷가지 정도만 챙겨 나온 사람들도 있다. 키르기스스탄 제2의 도시 오시에서 디나라라는 여성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공개하고 돈이 없는 러시아인들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여러분을 돕고 싶다. 돈은 없어도 된다. 식사 제공"이라고 썼다. 그러나 이같은 호의는 피난민이 늘어나면서 줄고 있다.

이곳에서 환대받는 러시아인들은 전 소련 연방 공화국에 비해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 모스크바 출신 바실리 손킨(32)은 키르기스스탄 인구의 10%가 러시아에서 허접한 일을 하면서 천대받았다면서 "다른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모스크바에서도 천대받은 이곳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으면서 제국주의로부터 휴가나온 느낌"이라고 했다.

피난민들은 아직 현지에 적응하는 중이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난민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징병 기피자로 불리는 것도 싫어한다. 베트남전쟁 당시 캐나다로 도피했던 미국 청년들과는 다르게 반전 정서도 거의 보이지 않은다.

극히 일부가 전쟁을 지지하지만 전쟁으로 죽기는 싫다고 했다. 소치에서 기술 기업을 운영하던 드미트리는 반전 시위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아조우 연대 포로 100 이상을 풀어준 포로 교환을 보고 실망했다고 했다. 그는 "푸틴이 처음부터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가 목표라고 했는데 정착 나치들을 풀어줬다"고 했다.

아내와 딸을 두고 떠나기를 망설였다는 그는 동원령으로 회사 직원들이 탈출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러시아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전쟁 동안 비슈케크에서 온라인으로 사업을 계속할 것이며 가족들도 데려올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 피난민들은 자신들을 "렐로칸티(relokanty)"라고 부른다. 벨라루스어로 한 때 번성했던 기술 부문 근로자들을 외국 기업으로 "재배치"한 벨라루스 독재정권의 정책에서 유래한 단어다.

키르키스스탄 관광협회장으로 비슈케크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에르멕 미르자베코프는 러시아 남성 근로자들이 머물 수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찾는 회사들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피난민 급증으로 항공료와 숙박료가 급등해 "큰 이익"을 올리지만 키르기스스탄 주민들이 러시아인들에 밀려나면서 긴장도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비슈케크와 오시의 호텔들은 "만실 상태"라면서 푸틴의 지난 30일 연설로 이런 상황이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모두가 푸틴이 너무 나가서 되돌릴 수 없을 것으로 본다. 러시아인들이 이곳에 오래 머무를 것"이라고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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