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핵협상, 소강 국면 벗고 내주 재시동
폼페이오, "고위급회담 다음 주 열린다"
2차 북미정상회담서 돌파구 마련 낙관
한미 워킹그룹, 교착 풀 묘수 마련 집중할 듯

【서울=뉴시스】강영진기자 = 핵사찰 방식을 둘러싼 북미간 이견과 중간선거 등 미국의 정치 일정 탓에 소강상태에 빠진 2차 북미정상회담 국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31일(현지시간) 미 라디오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다음 주 미국에서 북한측 카운터파트와 만나서 풍계리 핵실험장 등 '중요한 중요시설 두 곳'에 대한 사찰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은 2차 트럼프-김정은 회담 시기를 내년초로 예상하면서 "상당한 돌파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도 내놓았다.
이에 앞서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특별대표가 방한해 청와대와 외교부, 통일부 등 여러 곳을 두루 만나면서 북미 핵협상과 관련한 사전 점검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미 양국은 대북정책 조율을 위한 '워킹그룹'을 운영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워킹그룹의 기능에 대해선 미국이 남북협력 과속을 억제하기 위한 '과속방지턱'이라는 관측이 많다. 그러나 워킹그룹이 '남북협력 과속방지턱'에 그치진 않을 전망이다. 그보다는 미국이 한미간 조율에 더 신경을 쓰기로 했다는 의미가 더 커보인다.
현재 북미 핵협상은 톱다운 방식으로 진행 중이다. 정상들이 먼저 큰 틀에서 합의하고 실무진들이 합의의 세부내용을 채워나가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여러차례 합의와 파기를 반복해온 북핵 문제를 실무협상부터 다시 시작해 돌파구를 찾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정상들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핵문제의 세부 사항을 일일이 논의할 수 없기에 후속 실무협상이 내실 있게 진행되지 못하면 공허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지난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가 실질적인 북핵문제 해결국면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런 문제점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 만나 여러 차례 악수하고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면서 북핵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분위기는 만들어졌지만 구체적인 과실로 무르익지 못한 것이다.
과실이 잘 영글지 못하자 폼페이오 장관이 지난달 초 다시 평양으로 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장시간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는 1차 정상회담의 과실을 숙성할 책임 있던 성 김 미대사-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사이의 실무협상에서 진전을 보지 못한 문제들에 진전이 있었다.
폼페이오 장관이 밝힌 대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분명한 비핵화의사를 밝혔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중요 시설 두 곳을 미 조사관들이 볼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김정은이 직접 실무선에서 다룰 문제까지 해결하고 나선 모양새다. 이런 결과에 폼페이오 장관은 물론 트럼프 미 대통령조차 상당한 정도로 만족감을 표시했다.
다만 미국이 요구한 핵리스트 신고에 대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나름 합리적 이유를 내세워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미간에 신뢰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핵리스트를 전달해봤자 미국이 신빙성을 의심할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모든것이 다 무산될 것이 걱정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이 말하는 '신뢰 구축'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지난 9월 유엔 총회를 전후로 우리 정부는 '종전 선언' 채택이 신뢰 구축조치일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적극 추진한 바 있다. 3차 남북정상회담 뒤에 취한 조치여서 남북한 간에 교감이 있었다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북한은 '제재 해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최근까지도 북한 매체들이 줄곧 제재 해제를 집중 거론한다는 점에서 제재 해제가 북한의 생각하는 신뢰구축의 첫 단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자 문재인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에서 유럽 각국을 상대로 제재 해제를 역설했다가 거절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표면적으로 '비핵화 이전에 제재 해제는 없다'는 입장을 강력히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제재 해제를 고수하는 미국의 입장이 영구불변일 수는 없다. 이와 관련, 평양에서 돌아온 폼페이오 장관으로부터 대면보고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제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묘한 발언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재 해제를 요구했지만 미국으로선 당분간 풀 수 없는 입장이니 북한도 이해할 것이라는 뜻 정도로 풀이된다.
이후 북한은 비건-최선희 실무협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제의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건이 최선희를 만나기 위해 유럽을 어슬렁거렸지만 북한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폼페이오 장관이 10월말쯤 미국에서 고위급회담을 하자고 했고, 그 회담이 폼페이오 장관이 정한 시한을 열흘 가량 넘긴 다음 주 열리게 된 것이다.
북한이 비건-최선희 협상을 거부한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비건은 북핵문제에 문외한이다. 북한으로선 내용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비건을 상대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북핵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보다 김정은-폼페이오 면담에서 김정은이 직접 실무적 문제를 해결하고 나선 마당에 실무자가 협상에 나서기가 여의치 않다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한 듯하다. 이 추측이 맞다면 앞으로도 비건-최선희 회담은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폼페이오와 그에 걸맞는 북한측 카운터파트가 다음주 뉴욕에서 가질 고위급회담이 사실상 실무협상이 될 전망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카운터파트가 누가될 것인지는 아직 미정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통일전선부장)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많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동생이자 핵심 측근인 김여정일 수도 있다는 추측도 일부 나온다. 이 추측은 북한 체제 속성상 김영철 부위원장이 충분한 재량권을 가지고 협상에 나서기 어렵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한편, 비건 특별대표는 대북 실무협상 책임자에서 '대한국 책임자'로 역할이 변한 듯하다. 지난 달 방한에서 비건 특별대표는 이례적으로 청와대 임종석 비서실장, 정의용 안보실장, 윤건영 상황실장은 물론 강경화 외무장관, 조명균 통일부장관,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을 두루 만났다. 처음으로 한국의 북한 문제 관련 고위관계자들을 모두 만나 인사를 한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수시로 핵문제 해결을 위한 "시간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핵문제 타결이 앞으로도 빠른 시간내에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나아가 북한에 대해 북미간 쟁점이 타결되기 전까지 제재 해제를 먼저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현재 북미는 선(先)핵폐기 대 선신뢰구축 입장이 맞서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문제가 풀기 쉽지 않다는 것은 북한과 미국 모두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측 모두 현재의 협상 국면을 깨트리기 보다 계속 동력을 유지하면서 협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정은이 풍계리 핵실험장 등에 대한 미국의 사찰을 허용한 것은 이런 교착국면에서 상황이 악화하는 것을 막으려는 선의(善意)에서 나온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비건 대표는 북한 지도를 손에 들고 외무부를 방문했다.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행동이다. 그가 교착된 북핵협상의 돌파구를 실무적으로 마련할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국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제재를 유지하면서도 미국에 대해 신뢰 구축을 요구하는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묘수(妙手)가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 묘수는 한국 정부가 강력히 추진하는 남북협력을,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와 상충하지 않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풀어주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비건대표가 정부내 실세들을 두루 만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보인다.
마이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러시아 방문길에 밝힌데 이어 폼페이오 장관도 인터뷰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 시기를 내년 초로 예상했다. 이는 연내 2차 북미정상회담→종전선언 채택→김정은 서울 답방을 구상하는 우리 정부로선 당혹스러운 일이다. 이와 관련 볼턴도 폼페이오도 "아마도 내년초"라고 말하면서도 시기를 확정하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비건-이도훈 워킹그룹에서 비핵화-신뢰구축 대립을 풀어나갈 방안이 더 빠르게 마련된다면, 또 다음 주 미 중간선거 결과가 나온 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빠르게 정리된다면, 2차 북미회담 시기가 빨라질 수 있다는 전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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