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의 패왕별희와 경극

유명한 홍콩의 야경을 보기 위해 거리를 나섰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 호텔 주변을 걷는데 어디쯤에선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서있었다. 얼핏 지나가면서 들으니 그 곳이 배우 장국영(장궈룽:張國榮)이 투신자살한 빌딩이었다. 10층이 겨우 될까말까한 소박한 건물이라 세계적인 배우 장궈룽이 이렇게 허름한 호텔에 묵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거짓말 같은 뉴스가 세상을 뒤흔들었던 그해(2003년) 만우절, 비디오 방에선 영화 ‘패왕별희’가 불티나게 나갔다고 한다.
1993년에 개봉된 ‘패왕별희’에서 초나라 패왕의 의첩(義妾) ‘우희’로 분한 장국영. 하얀 분칠을 하고 붉은 빛 뺨에 갖은 치장을 하고선 새치름한 걸음걸이에 우수 어린 우희의 농염한 자태에 홀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명실공이 아시아 최고의 영화 패왕별희로 인간 장국영의 인기는 “왕의 남자 이준기는 저리 가라였다”고 하면 이준기 팬들이 뭐라 하려나?
젊은 나이에 떠나버린,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는 배우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언제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패왕별희. 이 영화가 그렇게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중국 전통이 지닌 고전미도 빼 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영화의 소재인 경극(京劇)은 곤극(崑劇)과 여러 지방극이 모체가 됐다. 어쩌면 곤극이 중국 무형문화재 중 가장 먼저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가 된 것은 장국영의 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패왕별희는 세계에 경극을 알리는데 막대한 역할을 했다.
경극은 중국 일대, 특히 남부 지방의 극음악이 북경으로 흡수되어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도 곤극이 지니는 비중이 가장 크다. 화려한 분장에 흥행을 위한 상업적 장치까지 다분 했던 경극에 비해 보다 순수하고 고전적인 곡조를 지니고 있는 곤극은 명대 중기에 강소성 곤산현에서 위양보(魏良輔) 등이 전통 희곡인 북곡(北曲)과 남곡(南曲)으로부터 구성한 것으로, 예전에는 ‘곤곡(昆曲)’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남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지라 어느 민족이든 극음악이 없는 곳이 없다. 중국 역시 각 지방마다 지방색을 지닌 다양한 극음악이 있었다. 이들은 대개 고전 가무를 바탕으로 나름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고강(高腔), 곤곡(崑曲), 판극(板劇), 피황(皮黃)이다.
곤곡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고강은 16세기 초 광서성(廣西省)의 익양(弋陽)지방에서 발생하여 양자강을 타고 이동한 순회가극단에 의해 급속도로 확산됐다. 이 때 각 지역에 있던 극단에서 고강을 받아들여 그 지역의 방언으로 노래하게 됐다. 그러는 사이에 각 지역의 민요도 고강 음악 속에 섞여 들면서 다양한 유파가 생겨났다.
이러한 영향으로 16세기 중엽에 소주(蘇州), 강소(江蘇), 곤산(崑山) 지역에서 곤곡이 생겨났다. 곤곡은 민요에다 창작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좀더 세련된 극음악으로 발전하였는데, 19세기까지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누렸다.
고강과 곤곡을 비교해 보면, 가장 오래된 연극인 고강(高腔)은 즉흥 연주가 주를 이루므로 가사가 적혀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쉬운 말을 주로 쓴다. 이에 비해 곤곡은 지식층을 위한 극이다 보니 기록된 대본을 위주로 하고, 기보된 악보를 바탕으로 연창(演唱)된다.
음악적인 성격을 보면 고강은 일자일음(一字一音)식으로 빠르게 노래하며 선율이 단순하여 대본은 길지만 실제 상연시간을 짧다. 이에 비해 곤곡은 한 단어를 길게 늘여서 부르므로 곡태가 매우 우아하여 고졸미(古拙美)가 있다.
‘판극’은 17세기 초(명나라 말엽)에 중국 북부 지역에서 생겨났다. 일명 ‘판자극’이라고도 불리는 판극의 명칭은 대추나무로 만든 방자(梆子)로 반주를 하는데서 비롯됐다. 현재의 경극에서 따닥따닥 두드리는 타악기는 모두 이러한 원형을 떠올리게 한다.
18세기에는 안휘(安徽)극, 호북(湖北)극, 광동(廣東)이 상당한 인기를 누린데 이어, 중국 남서부 지역 협서(陜西)지방에서 유행하던 ‘서피(西皮)’와 광서성 익황(弋黃)지방에서 생겨난 ‘이황(二黃)’의 혼합체인 ‘피황(皮黃)’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중국 각지에는 독특한 지방 민요에 근거한 많은 극음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19세기경 절강성(浙江省)에서 시작하여 상해로 퍼져 나간 소흥극(紹興劇)과 복건의 이원극(梨園劇)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극 중에서 곤곡은 교양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던 반면에 다른 지방극은 서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봉건 사회에서는 곤곡이 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데 비해,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지방극을 ‘인민 예술’로 칭송하는 바람에 당으로 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아 승승장구했다.
연극의 공연은 종교행사에도 빼 놓을 수 없는 메뉴였다. 축제 기간이 다가오면 순회 공연단들은 사원 밖에 임시 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했다. 공연 경비는 집집마다 다니며 모금을 했고, 연극 자체는 무료로 공연됐다고 하니 공짜 구경을 하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어떠하였을까? 옛날 우리네 시골 장날에 약장사 천막으로 모여들던 남녀노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중국 남부의 명문 귀족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도 극을 상연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경우는 주로 종묘(宗廟) 바깥에서 공연을 하며 마을 주민에게도 공개됐다고 한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부자들은 집안에 공연장을 마련하여 여러 가지 극을 동시에 봤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부자들의 장황한 스케일은 알아줄만 한가보다.
작곡가·음악인류학 박사 http://cafe.daum.net/ysh3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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